202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 역량강화 워크숍 개최 후기
불완전한 ‘세계의 기억’
‘Memory of the World’라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의 공식 명칭이 시사하듯이, 인류가 잊어서는 안될 ‘세계의 기억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중에는 교과서와 미디어에서 익히 접하는 역사적 사건과 밀접한 기록물들과, 풍부한 자원과 역량을 지닌 나라들의 기록유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은 전 인류적 가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록물들은 조명 받지 못한 채 손실 위험에 처하거나 기억의 뒤편에만 머물기도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 570건 중 유럽 및 북미의 기록유산은 290건으로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에 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25.3%, 아프리카 7.2%, 아랍 지역 2.1%, 중남미 12.3% 등 나머지 지역들의 기록유산의 비중은 현저히 낮다. 다양한 지역과 국가의 기록유산을 충분히 포함하지 못한 현재의 ‘세계의 기억’은 미완성 퍼즐처럼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기록유산 등재 불균형 뒤에는 국가들 간 기록유산을 발굴과 보존을 위한 자원과 역량 불균형이 자리하고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세계기록유산 국제 역량강화 사업
빈곤과 저개발, 기후변화와 분쟁 등 기록유산의 보존과 다양성을 위협하는 구조적이며 근본적인 원인들은 하루 아침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려운 실정 속에서도 자국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보존하고 발굴하는 데에 힘쓰는 국가들을 돕기 위해,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해마다 국가유산청과 개최국의 유네스코국가위원회와 협력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 역량강화 워크숍’을 개최하고 있다. 이는 기록유산 과소등재 국가들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대한 이해도를 제고하고 자문을 제공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심사기준에 부합하도록 기록유산 등재신청서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올해로 16주년을 맞이한 이번 워크숍은 파나마의 수도인 파나마시티에서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유네스코파나마위원회, 파나마 국가기록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중남미지역위원회와의 협력으로 개최되었다. 특히 이번 워크숍은 2015년 자메이카에서의 개최 이후로 십 년만에 중남미·카리브해 지역을 대상으로 실시된 워크숍이기도 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건수 4건 이하의 과소등재 국가들 중, 등재신청서를 제출하여 전문가들의 심사를 토대로 선정된 9개 국가들(도미니카공화국, 벨리즈, 수리남, 신트마르턴, 아루바, 자메이카, 코스타리카, 파라과이)이 올해 워크숍에 참가하였다.
중미, 남미, 카리브해 지역 등 중남미 전역 곳곳에서 모인 참가국들의 기록물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역을 관통하는 역사와 문화적 특성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억압에 맞선 여성들의 용기(도미니카공화국의 미라발 자매 판결 기록, 파라과이의 여성 모금 활동 장부), 강제 이주와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정체성(수리남의 자바계 이민자들 기록), 독립과 국가 건설의 여정(벨리즈의 수상실 컬렉션, 코스타리카의 중앙아메리카 평화협상 문서), 평화적 공존을 향한 노력(신트마르턴의 평화 조약), 그리고 음악과 문학을 통한 문화적 저항과 영웅적 개인의 기억(자메이카 스튜디오원 프로듀싱 기록, 온두라스의 지성 문예지, 아루바의 보이 에쿠리 컬렉션)까지. 이들은 모두 중남미 지역이 탈식민과 평화, 정의와 문화적 정체성 보존을 위해 걸어온 길을 증언하고 있었다.
맥락 속에서 찾아낸 새로운 시각
아무리 그 잠재적 가치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까다로운 일이다. 우선 등재시키고자 하는 기록물의 보존상태, 공공 접근성 등은 물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의 일반 지침(General Guidelines)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기준의 부합성을 효과적으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계적 중요성(World Significance)’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記術)력 뿐만 아니라 기록물의 가치가 어떻게 과거를 뛰어넘어 현재와 미래로, 국경과 대륙을 뛰어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는지 맥락화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워크숍에 참여하는 국제 전문가들은 IAC(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단), RSC(Register Sub-Committee; 등재소위원단), MoWCAP(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위원회) 기록유산 분야에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참가국의 기록물이 어떻게 세계 인류 역사의 한 물결을 이루는지 함께 더 깊이 탐구한다.
이처럼 3박 4일 간 참가자들은 단순히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 전문가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거시적 맥락에서 기록물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시각을 키워나갔다. 워크숍 마지막날 참가자들의 최종 발표 세션에서 그들이 쏟아부은 열정과 치열한 수고로 이루어낸 발전과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워크숍이 본인에게 꼭 필요했음과, 많은 도움을 받아 기쁘다는 감회를 밝혔다.
언어와 국경을 넘은 협력
올해 워크숍의 또다른 주요 의의는 바로 ‘협력’에 있었다. 해외의 먼 타지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이는 국제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크고 작은 수고로움이 따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 많은 이들의 협조와 지원이 있었기에, 그 수고를 나누고 올해 워크숍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기꺼이 행사장을 제공하고 준비과정부터 워크숍 기간 내내 아낌없이 협조해준 파나마 국가기록원, 기록유산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길 수 있었던 현지 답사를 주관한 유네스코파나마위원회와 이에 협조해준 파나마의 각 정부 부처 및 기관들, 스페인어와 영어 간 듬직한 소통의 다리가 되어준 전문 통역사와 현지 코디네이터들, 중남미 지역적 맥락에서 기록유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해준 중남미 세계기록유산 지역위원회 등, ‘2025년 세계기록유산 국제 역량강화 워크숍’은 언어와 국경을 넘어 함께 한 모든 이들의 수고와 적극적 기여가 시너지를 이루어 빛을 발한 진정한 국제 협력의 장이었다.
기억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
파나마 운하 끝자락에 위치한 미라플로레스 방문자 센터(Miraflores Visitor Center)에는 선박들이 운하와 태평양 사잇길을 오가는 장관을 보기 위해 연간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다. 화물을 가득 실은 거대한 선박이 겨우 들어설 정도로 좁은 수로를 거쳐 광활한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수로의 수위를 바다 수면에 맞춘 후 수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기록유산 등재를 향한 여정도 마치 이와 닮아있다. 우리가 성장하고 더 큰 삶의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관문을 통과해야 하듯이,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좁은 길을 따라 여러 관문들을 통과해야 한다. 워크숍 참가국들은 그 중 등재신청서를 다듬고 완성시키는 중요한 관문을 넘어서서, 세계의 기억의 바다 속 물결이 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 그 뜻깊고 소중한 여정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와 영광을 느낀다.
국제협력사업실 계윤신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