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수상자 임미희 교수
여성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여성의 머리로 사고하는 과학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유네스코가 오래 전부터 던져온 이 질문은 ‘누가 더 나은지’를 판별하려는 게 아니라 ‘함께할 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로레알코리아와 함께 매년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을 시상해 왔고, 지난 7월 16일에는 스물 네 번째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기여할 잠재력을 갖추고 여성과학자의 역할과 위상 제고에 기여한 과학자에게 수여되는 학술진흥상은 ‘분자 수준에서 알츠하이머병 발병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를 한 공로로 KAIST 화학과 임미희 교수가 수상했는데요. ‘금속신경화학’이라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분야에서 신경 퇴행성 질환의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모색해온 임 교수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다양한 연결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학을 하고 싶습니다
+ 2025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학술진흥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수상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상을 받게 되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화학 분야에서 치매라는 다소 낯선 주제를 다뤄 왔기에 사실 특별한 상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요. 이 상을 통해 화학 분야에서도 이러한 연구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곧 50세가 되는 중견 과학자로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여기고 정진하겠습니다.
+ 분자 수준에서 알츠하이머병 발병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로 수상을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인지, 그러한 연구가 치매 치료에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쉽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제 연구는 ‘금속신경화학’ 분야에 속합니다. 흔히 금속은 독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이나 구리, 아연과 같은 금속 이온은 우리 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한데요. 문제는 이 금속들이 홀로 존재하기보다는 단백질 등 다른 파트너와 결합해 함께 생체 네트워크를 이루어 활동한다는 점입니다. 정상적인 금속 네트워크가 어떤 이유로든 망가지거나 각자 ‘따로 놀게’ 되면 독성이 생겨 알츠하이머병 같은 질환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네트워크가 어떻게 깨지고, 어떻게 다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지를 분자 수준에서 규명합니다. 특히 뇌에서는 금속 이온의 위치와 상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잘못 배치된 금속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전략이 치매 치료제 개발의 중요한 방향이 될 수 있습니다.
+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후각에 영향을 주는 일산화질소 연구를 하면서 뇌 기능과의 연결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후각 신경이 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뇌 질환으로 관심이 이어졌고, 금속 이온이 뇌 기능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궁금해 이 주제에 뛰어들게 됐죠. 특히 미시간대 조교수 시절에 뜻깊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교수인 저에게 치매 환자 가족분들이 직접 수를 놓아 만든 제품을 판 돈으로 연구를 지원해 주셨는데, 그 액수와 횟수가 무려 1억 원씩 두 번에 달했어요. 지금 돌아봐도 믿기지 않는 일이에요. 이분들께 치매에 대한 강연도 해드리면서 관련 연구를 진행했는데, 저의 연구가 소분자 중심의 치료제 후보군이라는 점을 알아보시고 희망을 주신 것 같아 매우 감사했습니다. 치매 환자 가족분들의 간절함, 그리고 제 연구의 무게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계기였죠. 이 경험은 제게 이 분야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강한 동기가 됐습니다.
+ 연구와 인생에서 ‘관계성’이 중요한 순간이 많았다고요.
제 연구는 화학, 생명, 의학, 신경과학 등 여러 분야의 학제적 협업을 바탕으로 하기에 관계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10여 년 전, 여러 표적을 함께 겨냥하는 이른바 ‘멀티타겟 접근’을 처음 제안했을 때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한국 학회에서는 공동 연구를 선호하지 않는 등 ‘연구에서의 관계성’이 인정받는 데 어려움도 있었죠. 그래서 오히려 이 관계성이 과학 연구에서 갖는 의미를 내가 직접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에서도 저는 여성 과학자, 화학자, 해외 및 국내에서의 역할 등 매우 다양하고 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제 MBTI가 ESTJ, 흔히 말하는 ‘외교관’ 유형인데,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2029년 제주에서 열릴 약 1,000명 규모의 국제학회를 유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젊은 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성장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과거 무기화학 분과 총무부회장을 맡았을 때는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26명의 운영진과 함께 조직을 꾸려 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나 “위와 아래를 잘 이어 준다”는 평가를 들으며, 연결이 갖는 힘을 더 확신하게 됐습니다.
+ 여성과학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지원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더 많은 여성 과학자가 생활하기 편한 시스템이 필요한가?’, 아니면 ‘보고 따라서 달릴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한가?’. 제 입장에서는 후자의 문제의식, 즉 우리나라 여성 과학자의 리더십 모델이 부족하다는 점에 더 치중하게 됩니다. 물론 세대마다 그 답은 다를 거예요. 저는 말하자면 ‘낀 세대’로, 심한 차별도, 완전한 평등도 경험하지 않은 세대죠. 그래서 여성과학자를 위한 시스템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리더 모델’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산·돌봄 등 생활 기반을 받쳐 주는 제도는 기본이고, 그 위에서 후배들이 따라 걸을 수 있는 선배가 많아질수록 후배들도 덜 망설이면서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유명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명예연구원과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각각 1998년·2008년 로레알-유네스코 세계여성과학자상 수상자) 등 여러 빛나는 선배들이 계시지만, 아직은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다양한 리더십이 더 많이 등장해야 선순환이 만들어지고, 본인이 앞에 서지 않아도 계속 달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거예요.
+ 교수님의 발자취는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여성 동료와 후배들에게 귀감과 용기가 되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여정에 이처럼 영향을 준 멘토나 동료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의 멘토는 지도교수님들과 동료들입니다. 석사, 박사, 박사후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지도교수님들의 스타일은 모두 달랐지만, 공통점은 한 가지였어요. 누구도 제게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박사후 과정을 할 때 지도교수님은 당시 학과의 거의 유일한 여성 교수셨고, 한 빌딩의 11개 층 중 여성 화장실이 1개 층에만 있던 현실을 바꿔 모든 층에 여성 화장실을 설치하도록 이끈 분이었습니다. 그 용기와 실행력을 보면서 저도 성장할 수 있었고, “할 수 있다, 왜 당신이 못 하겠느냐”는 그분의 격려는 지금까지도 저를 움직이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KAIST에 있는 한 동료도 저의 멘토입니다. 연구자는 조용히 실험실에만 있어야 한다는 시선도 있지만, 저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에도 역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번에도 내가 나서야 할까”라면서 망설일 때, 그 동료는 “교수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차분히 이성을 일깨워 줍니다. 필요하면 함께 앞에 서 주기도 하고요.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며 필요할 때 기댈 수도 있는 이런 동료야말로 연구를 오랫동안, 그리고 건강하게 이어 가게 하는 가장 든든한 힘이라고 믿습니다.
+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느낀 장점과, 후배 연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아시아 출신 연구자는 세계 학계에서 아직 소수라서 더 눈에 띕니다. 실력은 기본값이고, 그 기반이 갖춰져 있다면 인정과 관심을 받기에 유리하다는 점이 분명한 장점이에요. 아시아 문화권 특유의 존중하는 태도도 네트워킹에 큰 힘이 됩니다. 무대에서는 카리스마와 명료함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내려와서는 존중과 예의를 보여 주는 태도로 대화에 임하면 관계가 깊어집니다. 네트워크는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꾸준히 연락하고, 작은 협업부터 이어가며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게 핵심이에요. 우리 연구자들이 가진 강점을 살려 조금 더 당당하게 외향적으로 손을 내민다면 기회는 확실히 커집니다. 저 역시 그런 연결이 이어지도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으려고 합니다.
+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 과학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여성과학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세대 여성과학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나 격려의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첫째,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건 내가 끌어줄 테니 따라오기만 해라”라고 늘 말합니다. “내가 땅을 팔 테니, 나무만 심어라. 물은 안 줘도 된다. 비는 저절로 오니!” 두려움은 본인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반드시 1등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세대의 앞에는 선배들과 그들의 노하우, 그들이 걸어온 길이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이런 길을 밟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키웠으면 좋겠어요.
둘째, 최소 10년은 꾸준히 달려 보세요. 기초과학은 본질적으로 시간이 걸립니다. 오래 버티는 힘이 결국 길을 보여 줍니다. 국가는 연구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인내심을 갖고 지원해 주어야 하고, 연구자는 ‘좋은 논문’에 더해 자신의 연구를 알리고 협업 네트워크를 넓히는 일을 병행하길 권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 주세요. 연구는 혼자가 아니라 연결 속에서 더 멀리 갑니다. 자신의 이름과 작업을 당당히 세우면서, 사람들과의 연결을 꾸준히 키워 보세요. 그것이 결국 본인을 더 먼 곳까지 데려다 줄 것입니다.
📝 인터뷰를 마치며
임미희 교수와의 대화 후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연결’이었습니다. 연구 속 금속 이온의 네트워크처럼,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이 더 단단해질수록 과학의 지평도 넓어진다는 믿음. 임 교수의 목소리는 후배 연구자들에게 “함께 걸어주는 선배가 있다”는 든든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과학계 안팎의 더 공정하고 넓은 무대를 향해, 오늘도 연결을 이어가는 그 발걸음을 응원합니다. 오늘의 연결이 내일의 해답으로 이어지기를!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최연수, 김지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