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바닷가 백사장에 아이들을 자유롭게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파도와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마도 어김없이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거예요.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글을 배웠든 안 배웠든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 그림들을 톺아보면 아이들의 마음도 보일 거예요. 상상할 수 없이 다채롭고 아름답고 광활한, 조그만 머릿속에서 매 순간 끝없이 펼쳐지는 세상의 모습 말이죠.
드넓은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 호기심, 혹은 두려움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 그것을 ‘그림’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욕구는 아주 오래 전부터 모든 인간이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구상 모든 대륙에서 선사시대의 바위그림(岩刻畵)들이 발견되고 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도 바위그림 관련 유산이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해요. 1979년에 등재된 프랑스의 베제르(Vézère) 계곡 동굴벽화와 이탈리아의 발카모니카(Valcamonica) 암각화를 시작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위그림은 30여 개에 달해요. 구성 항목 중에 바위그림이 포함된 유산까지 합하면 50여 곳에 이르죠. 그 숫자는 이번에 우리나라의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이 되면서 또 하나 더 늘어났어요. 그래서 오늘은 아프리카 내륙 깊숙한 곳에서부터 남태평양 망망대해 위의 이스터 섬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초월하여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인류의 유산인 바위그림에 대한 지식을 한번 나눠보기로 해요.
+ 바위그림? 암각화? 뭐가 달라요?
바위그림(岩刻畵, Rock Art)은 흔히 한자 원문 그대로 ‘암각화’라고 표기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는 지표면(주로 암석 위)에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에요.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국가유산 지식이음 사이트에 따르면 바위그림의 제작 기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천연 안료를 이용하여 그린 암채화(rock picture)이고, 다른 하나는 쪼기나 갈기, 긋기 등의 방법으로 새겨서 그린 암각화(petroglyph)가 있어요. 물론, 이 두 가지를 혼용한 바위그림도 있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 바위그림이 많은 이유는?
바위그림이야말로 선사시대부터 고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초월하여 가장 보편적으로 찾을 수 있는 예술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에요. 마치 아이들이 틈만 나면 땅 위에 그림을 그리듯, 까마득한 옛날의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인류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활용해 눈앞에 있는 평평한 대상 위에 자신의 생각과 꿈을 표현했어요. “공간적으로는 그곳이 비록 비어 있는 황무지라고 할지라도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인류가 거주하였던 곳이라면, 대체적으로 바위그림을 살필 수 있다”(국립문화유산연구원)는 문구에서 보듯, 이 보편성 덕에 바위그림은 인류가 정주하는 모든 대륙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고, 세계유산 목록에도 끊임없이 추가되고 있어요.
+ 바위에 주로 표현된 대상은?
바위그림에 가장 널리, 보편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상은 바로 동물인데요. 해당 작품이 만들어진 지역의 풍경이나 기후를 특징짓는 동물들이 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는 바위그림의 고고학적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요인이 되어요.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레소토의 말로티-드라켄스버그 공원(Maloti-Drakensberg Park, 2000년 등재)의 바위그림에는 아프리카 영양의 일종인 엘란드(eland)가, 아르헨티나의 라스 마노스 동굴(Cueva de las Manos, 1999년 등재)에는 남미의 낙타과 동물인 과나코(guanaco)가, 카자흐스탄의 탐갈리 고고학 유적(Archaeological Landscape of Tamgaly, 2004년 등재)에는 말이, 요르단의 와디 럼(Wadi Rum, 2011년 등재)에는 낙타가 묘사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올해 등재된 우리나라 반구천의 암각화에는요? 바로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새겨져 있어요. 북방긴수염고래와 혹등고래, 귀신고래, 그리고 범고래까지, 여기에 남겨진 다양한 고래들의 모습은 이곳이 고래 사냥 장면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암각화 중 하나임을 증언해 줍니다.
+ 바위그림이 우리 모두의 소중한 유산인 이유는
필라르 파타스 몬포르테(Pilar Fatás Monforte)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연구센터 및 박물관장은 전 세계 바위그림들의 진정한 공통점으로 “자연 및 인간에 기인한 요인들로부터 언제든 훼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꼽았어요. 바위그림들이 대개 비바람에 노출된 바위 위, 수시로 수위가 변하는 강가나 습한 동굴 안에 위치하기 때문인데요. 자연적인 요인 외에도 세계유산의 인기에 따른 관광객 숫자 증가 등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은 전 세계의 바위그림 유산이 함께 받아든 과제라고 할 수 있어요. 몬포르테 관장은 또한 바위그림들이 단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정체성의 일부”라는 점에서도 소중하다고 이야기해요. 바위 위에 남은, 우리의 선조들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선은 결국 우리 문화의 일부로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로 전해졌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단지 바위그림 자체를 잘 보존하는 일을 넘어, 그것이 포함된 자연·문화적 경관과 그것을 둘러싼 지역사회 모두를 건강히 지키는 일이 우리 앞에 공통으로 남겨진 과제임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알쓸U잡 더보기 🧐 | 대륙별 바위그림 세계유산 ‘원픽’, 여기에 반구천의 암각화도 곁들인
아프리카 | 초딜로 힐스(Tsodilo Hills, 2001년 등재)
바위그림이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예술형식이라 할 수 있는 만큼, 호모 사피엔스의 ‘고향’인 아프리카 대륙에는 특히 바위그림 유산이 많이 있어요. 그중에서도 10만 년 이상 기간 동안의 인간 활동 흔적이 남아있는 보츠와나의 초딜로는 바위그림 유산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에요. 이곳에서는 칼라하리 사막 내 불과 10㎢의 영역 안에서 무려 4,500점이 넘는 바위그림이 발견되어 ‘사막의 루브르’라는 별명까지 얻었답니다.
오세아니아 | 카카두 국립공원(Kakadu National Park, 1981년 등재)
호주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에 위치한 카카두 국립공원은 4만 년 이상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해 온 장소예요. 이곳에서 발견되는 바위그림들은 선사시대 수렵채집인부터 현재의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 사람들의 기술과 생활 방식을 간직하고 있어요.
아메리카 | 리오 핀투라스의 라스 마노스 동굴(Cueva de las Manos, Río Pinturas, 1999년 등재)
아르헨티나의 핀투라스 강가에 위치한 이 동굴에는 약 1만 3000년~9500년 전에 그려진 동굴벽화들이 보존되어 있어요. 바로 ‘손 그림’으로 유명한 그 동굴이에요. 이곳에는 손 그림 외에도 다양한 동물들과 그 사냥 장면도 그려져 있어요. 이 벽화를 남긴 사람들은 19세기에 파타고니아 지역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들이 만났던 사냥-채집 공동체의 조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유라시아 | 알타미라 동굴과 북부 스페인의 구석기 시대 동굴 예술(Cave of Altamira and Paleolithic Cave Art of Northern Spain, 1985년 등재)
알타미라 동굴은 1985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후 구석기시대 인간이 사용했던 동굴 17개가 더 발견되어 2008년에 ‘알타미라 동굴 및 북부 스페인 구석기 동굴 미술’이라는 새 명칭과 함께 유산이 확장되었어요. 이곳의 깊은 동굴 내 지하 공간에는 3만 5000년부터 1만 1000년까지의 탁월한 구석기 동굴벽화들이 온전히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 반구천의 암각화와 더불어 세계유산 등재기준 ⅰ(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충족하는 몇 안 되는 바위그림 유산 중 하나예요.
그리고, 한국 | 반구천의 암각화(Petroglyphs along the Bangucheon Stream, 2025년 등재)
반구천의 암각화는 울산 반구천(대곡천의 옛 이름) 상류 지역의 약 3km에 걸친 지역의 바위 절벽에 새겨진 암각화들과 암각서들을 포함하는 바위그림 유산이에요. 크게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와 울산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147호)로 나눌 수 있는데요. 인물 14점, 동물 193점, 선박 5점, 도구류 6점, 미상 78점 등 300점 이상의 그림이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연대는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고 있어요. 천전리 암각화는 신석기 말 또는 청동기 초기의 동물과 인물상 암각화, 청동기 중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추상 암각화, 철기시대의 선각 인물과 동물상 암각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 이르는 글씨 등이 여러 층으로 겹쳐서 새겨져 있는 독특한 유적이에요. 다양한 주제와 폭넓은 제작 연대를 보여주는 이 두 암각화는 상호 비교 대상이 되면서, 각 시대별 문화와 변화 양상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