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영남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시뻘건 불길이 온 산과 하늘까지 물들이는 광경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잇따르는 생명과 재산 피해 소식에 커다란 안타까움과 상실감도 느꼈는데요. 전문가들은 이러한 재난이 자연재해인 동시에 인재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점점 더워지는 지구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안타까운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후위기를 멈춰 세워야만 하는데요. 그간 인류가 보여준 의지와 새로 불거지는 국가 간 갈등 상황을 보면 ‘할 수 있다’는 희망보다 ‘과연 될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위기의 시기,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하는 유네스코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해요.
산불, 홍수, 가뭄, 그리고 슈퍼태풍.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수많은 생명과 재산 피해를 내고 있는 극단적 날씨 뒤에는 이제 ‘기후위기’라는 말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가 인간의 활동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그런데 이렇게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행동을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해 각국이 내세운 목표도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가운데, 오히려 많은 나라에서는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국가 간 대화와 타협의 여지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인데요. 주저할 시간도, 숙고할 여유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국제 협력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유네스코는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각자의 의지와 생각을 확인하고, 이를 확산시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 2024년, 1.5°C 선이 무너지다
지난 1월, 세계기상기구(WMO)는 공식적으로 2024년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시기(1850-1900년)에 비해 1.55°C 더 높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2024년은 인류가 지구 평균기온을 산출한 이래 가장 더웠던 해인 동시에, 사상 처음으로 ‘산업화 이전 대비 평균기온 상승폭 1.5°C 이내 유지’라는 파리협정의 목표치를 지키지 못한 해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인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모인 전 세계 195개국 대표들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가능한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약속했었는데요. 그 1차 저지선이자 최선의 저지선이 결국 무너지고 만 셈입니다.
“우리는 땅과 해수면에서 이례적인 기온(상승)을 관찰했고, 이례적인 대양의 열기가 세계 곳곳에서 극단적인 기상 현상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일상, 희망과 꿈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WMO 대변인의 이 말에서 보듯 보고서에는 ‘이례적인(extraordinary)’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안타깝게도 이 표현은 고온 현상 자체가 이례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승폭과 이로 인한 피해의 규모가 이례적으로 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를 향해 날카롭게 치솟은 그래프의 추세선의 모습은, 이와 같은 재난들이 앞으로는 더 이상 이례적인 일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셀레스테 사울로(Celeste Saulo) WMO 사무총장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기후의 역사는 한두 해의 특별한 기록이 아니라 10년에 걸친 추세”라면서, “이제는 온난화의 한 눈금 한 눈금이 우리의 삶과 경제와 지구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할 때”라고 경고했습니다.
+ 아직 실패라 하긴 이르지만
여기서 한 가지 팩트 체크! 2024년을 기준으로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C 이상으로 높아졌다면, 파리협정은 이제 실패했다고 봐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 WMO는 아직 그러기에는 이르다고 말합니다. 최선의 목표로 삼은 1.5°C든, 차선이자 마지막 저지선으로 삼은 2°C든, 파리협정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기온 상승폭은 특정한 한 해가 아니라 몇 년간의 기간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WMO는 “(파리협정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정말 큰 위험에 처해 있다(not yet dead but in grave danger)”고 말하면서, 이번 기회에 우리가 목표로 했던 저지선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전문가들이 찾아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정확히 어디까지 왔는지, 막아야 할 지점까지 얼마나 많이 남았고 또 어떻게 해야 이를 막을 수 있을지를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이지요.
실패라고 단정짓기엔 아직 이르지만 기후위기와의 싸움에서 인류가 ‘9회말 투아웃’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는 표현에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작년에 새로 쓰여진 지구 평균기온 기록이 올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기대할 이유는 거의 없고, 코앞까지 다다른 2°C라는 기온 상승폭은 지난 5백만 년 동안 지구 생태계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절실한 것이 ‘역전만루홈런’이라면, 그 홈런이란 당연히 더욱 적극적이고 긴밀한 국제 협력과 연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파리협정 체결 이후 각국이 새로 내놓거나 개정하고 있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는 1.5°C는커녕 2°C 선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기후행동추적기(Climate Action Tracker)에 따르면 각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탄소배출 저감 대책이 모두 시행된다고 가정해도 2100년까지 지구평균기온 상승 예측값은 2.7°C에 이릅니다. 2030년까지 달성하겠다고 제시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NDC)를 모두 달성한다고 해도 2.1°C입니다. 분명 파리협정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인류는 그게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각국의 정책 실현 의지는 오히려 더 큰 도전을 받고 있는데요. 여러 나라의 선거에서 시민들은 정치권과 정부의 기후 관련 정책에 대해 이전과 같은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친환경 정책이 경제적 부담과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여러 나라에서 배타적이며 과거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가진 정당들도 약진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그린래시(greenlash, 친환경을 뜻하는 ‘green’과 반발을 뜻하는 ‘backlash’의 합성어)’라는 용어를 붙였는데요. 그린래시가 202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나타난 극우 정당들의 급부상,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5년 만에 복귀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배경 중 하나라는 분석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후위기 관련 정책에 대한 역풍이 확산되면서 여러 나라에서는 그간 시행해 왔거나 계획하고 있던 친환경 정책들이 뒷걸음질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 이은 탄소배출량 2위 국가이자 세계 정치·경제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 행정부를 바라보는 환경주의자들의 우려가 매우 큰데요. 예상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복귀와 동시에 파리협정 재탈퇴를 선언했고 유네스코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와 다자협력체제의 탈퇴도 검토중입니다. 녹색전환연구소 김병권 위원의 말대로, “기후를 위한 조치를 전속력으로 가속시켜도 모자랄 국면”에서 우리는 향후 몇 년간 환경 정책의 “역사적 후진”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 어두운 밤을 빛낼 시민들의 의지
코로나19가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을 향한 인류의 여정에 작지 않은 걸림돌이 되었듯, 친환경 정책의 취약한 정치적 지지기반과 국제 정치의 위기 징후들은 탄소중립 달성을 향한 길이 앞으로도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상케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지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2024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77개국에서 실시한 대규모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응답자는 80%에 달했습니다. 한국은 세계 평균보다 더 높은 88%였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전년보다 더 걱정된다’고 답한 응답자도 53%에 달해 ‘덜 걱정한다’고 답한 응답자(15%)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체감하면서 갖게 된 위기감을 환경 정책에 대한 일관된 지지로 연결시키지는 않고 있지만, 지구의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는 더딘 진전과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우리가 아직 희망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역사회나 시민들의 관점이나 전문성을 반영한 더 나은 정책을 만들고, 시민 간의 지식 교류와 파트너십을 강화함으로써 각자의 마음 속 생각을 눈에 보이는 흐름으로 모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역풍을 거슬러 우리가 정말 바라는 미래를 향한 바람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들의 정치적인 선택이란, 결국 늘 살아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다수 시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지를 확인해 서로 연결하고 더 단단한 매듭을 만드는 일. 이것은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유네스코가 끈질기게 해 온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유네스코가 다른 국제기구와 달리 ‘국가위원회’라는 조직을 따로 두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일을 하기에 유리한 배경인데요. 단순히 정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다양한 민간의 목소리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점에서 유네스코 국가위원회는 서로 다른 분야, 서로 다른 입장과 다양한 시각들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영역에서 이와 같은 국가위원회와 시민사회 간 협력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지속가능발전교육(ESD) 공식프로젝트를 들 수 있는데요. 국내 환경에 맞는 지속가능발전교육 모델을 널리 공유하기 위해 2011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서는 현재 정부와 지자체, 학교, 비영리단체를 망라하는 175개 프로젝트가 세대와 세대, 영역과 영역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실천 사례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꿈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유네스코오스트리아위원회는 자국 내 미술관, 극장, 대학, 전문가, 비영리단체 및 관련 정부 부처 등을 모은 ‘문화다양성 실무 그룹’을 통해 문화다양성 증진이라는 글로벌 의제를 지역 차원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있고, 유네스코독일위원회는 민간기업과 유네스코 및 학계의 다자 간 협력을 통해 기후변화 교육을 지원하며 시민사회의 대응 역량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네스코는 청년, 도시, 기업 등 주요 파트너와 지식 교류를 확대하고 파트너십을 강화하면서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 지식과 지식 사이를 촘촘하게 연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을 찾아 함께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데요. 그러니 혹시 기후위기 소식을 접할 때마다 SNS에서 그저 ‘좋아요’를 누르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답답하고 화가 난다면, 시민사회와 함께하는 유네스코의 여러 사업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똑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세요. 그렇게 우리 모두의 곁에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변화를 요구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어두운 밤에도 그 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김보람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