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회사들! 우리는 당신들 뒤를 봐 주고 있는데, 당신들은 우리 뒤를 봐 주고 있나요?”
지난 2월 2일, 전년도의 대중음악 업계를 결산하는 그래미(Grammy)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미국의 가수 채플 론(Chappell Roan)이 시상대에 올라 외친 말이에요. 십대 때부터 유튜브에 자작곡을 올리며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채플 론은 2015년 거대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었지만, 회사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계약을 해지해 버렸어요. 하지만 그는 작은 독립 레이블과 다시 계약을 맺은 뒤 데뷔 앨범을 냈고, 이번 수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렸죠. 시상대에서 채플 론은 “예술을 향한 열정을 그대로 가진 채 시스템으로부터 배신당하던 경험은 정말 큰 좌절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기업들은 소속 아티스트들을 가치 있는 직원으로 여기고 적절한 생계비와 의료보험을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이처럼 문화예술 종사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자주 나오고 있는데요. K-팝 지망생들의 불공정 계약과 착취 논란, 방송가 프리랜서들의 부당한 처우 등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어요. 이러한 관심은 이제 경제 분야의 주요한 트렌드 중 하나로 자리잡은 ‘공정무역(fair trade)’을 넘어 ‘공정문화(fair culture)’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 공정무역의 사각지대에 놓인 문화예술
만약 커피 한 잔 마실 때도 ‘이 원두가 원산지의 커피 농장에 제값을 주고 사온 걸까’하고 신경쓰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가슴 따뜻한 공정무역 지지자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소비자로서 단순히 좋은 제품을 싼 가격에 이용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제공하는 기업이 생산 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나 서비스 제공자와 공정한 거래를 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정무역은 이제 경제 영역 전반에서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했는데요. 덕분에 점점 더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제품 생산이나 서비스 제공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했는지, 작업 환경이나 계약 조건에 인권 침해 사유는 없는지를 살피면서 이를 홍보하기도 해요.
하지만 아직까지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고 있어요. 문화예술 상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이 여타 공산품이나 서비스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알음알음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 단위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은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법적으론 노동자가 아니고, 따라서 4대보험이나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요. 이 문제는 특히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더욱 두드러졌는데요. 수많은 공연이나 전시, 문화상품 제작이 취소되면서 예술가와 창작자들은 일거리가 끊겼지만, 그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게 해 줄 안전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던 거죠. 반면에 비대면 트렌드의 확산과 더불어 같은 기간 동안 급격히 성장한 문화 관련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그 수익을 아티스트들과 공정하게 나누는 데 인색했어요. 시장은 커지지만 그 파이는 일부에게만 돌아가고, 종사자는 많아지지만 그 다양성은 충분히 넓어지지 않는 상황. 이것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상상력과 번득이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업계의 미래가 지속가능하지 못할 거란 우려가 커졌어요.
+ 지속가능한 문화예술을 위한 약속
유엔기구 내에서 전 세계 문화 분야를 관장하는 유네스코는 이러한 문화예술계 안팎의 고민을 인지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나섰어요. 한국을 비롯해 프랑스, 케냐, 독일의 유네스코국가위원회가 참여하는 글로벌 협력 컨소시엄을 구성했고, 2년에 걸쳐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고 관련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 결과 작년 9월에 나온 것이 바로 「공정문화 헌장(Fair Culture Charter)」이에요.
공정문화 헌장은 다양한 문화 간 공존, 국가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 및 주권 보호를 위해 유네스코가 2005년에 채택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협약(문화다양성 협약)」에 그 바탕을 두고 있어요. 여기에 기업을 비롯해 창의경제 및 시민사회의 추가적인 협력 파트너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공정문화 헌장은 문화다양성 협약에 담긴 정신과 가치가 업계 내의 바람직한 관행과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만들고자 해요.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이 헌장은 「공정무역 헌장(Fair Trade Charter)」에서도 영감을 받았어요. 공정무역 헌장이 대중과 업계의 관심을 끌면서 전 세계, 특히 개발도상국의 농업 생산자들의 생계를 개선하고 불합리한 관행을 바꾸는 데 기여했듯, 문화상품과 서비스 거래의 특수성을 반영한 공정문화 헌장을 통해 문화 및 창의 산업에도 공정무역의 원칙이 적용되도록 하려는 거예요.
알쓸U잡 돋보기 | 공정문화 헌장의 8원칙
- 적정한 근로 조건과 공정한 보상(Decent working conditions and fair remuneration)
- 다양한 문화적 표현과 자원에 대한 접근(Access to diverse cultural expressions and resources)
- 차별 금지와 성평등(Non-discrimination and gender equality)
- 지역 발전(Local development)
- 시장 접근(Market access)
- 디지털 공정성 및 윤리(Digital equity and ethics)
- 환경 존중(Respect for the environment)
- 대중과 소비자 인식(Public and consumer awareness)
모두 8개 원칙을 담고 있는 공정문화 헌장에는 조직, 또는 개인이 누구나 서명에 참여할 수 있어요. 유네스코 역시 헌장을 발표한 이후 전 세계 회원국과 관련 분야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서명하는 것이 곧 법적 의무와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서명에 참여함으로써 해당 조직이나 개인은 공정문화의 원칙을 지지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게 돼요. 더 많은 지지와 더 많은 관심이 싹틀 때, 좀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는 거대 문화예술 기업들도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 수 있는 거죠.
뿐만 아니라 2025년은 문화다양성 협약이 제정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요. 우리나라는 문화다양성 협약 정부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고(2021년), 위원국으로서도 꾸준히 활동을 펼치고 있어서 공정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이행하는 데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국가예요. 무엇보다 K-팝과 영화, 드라마가 전 세계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이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에게 더 좋은 환경과 공평한 처우를 제공하는 일은 K-콘텐츠의 앞날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거예요. 예술은 원래 배고프고 힘든 거 아니냐고요? 천만의 말씀. 월드스타 레이디 가가(Lady Gaga)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 지금까지는 단지 “행복한 예술가가 위대한 예술을 만들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이에요!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