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열린 노벨상 축하연 단상에 오른 한강 작가는 특유의 수줍은 듯 차분한, 맑고도 또 단단한 목소리로 짤막한 수상 소감을 영어로 말했습니다.
“⋯ 가장 어두운 밤에도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묻고, 이 행성의 모든 생명과 인간이 각자의 관점에서 상상해 보기를 요청하며, 모두를 연결합니다. 따라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일종의 체온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읽고 쓰는 행위 역시, 생명을 파괴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언어는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도록 하고 우리를 연결해 줍니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우리가 연결되는 길목에는, 서로 다른 언어의 바다 위에 다리를 놓아주는 번역(통역)이 있죠. 고유한 질문과 관점으로 가득찬 각각의 세상들을 타인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마침내 하나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일. 그래서 유네스코는 번역을 서로 다른 세상을 이어주는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 ‘한국’이라는 세상을 세계에 알린 번역 사업
생소하고 알려지지 않은 세상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마음 속에 평화의 방벽을 쌓고자 하는 유네스코는 일찍부터 번역 사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네스코는 설립되자마자 1930대부터 국제 연맹이 수집하고 있던 전 세계 번역 데이터베이스 색인인 ‘Index Tranmslationum’을 넘겨받아 운영했고, 1960년대에는 소수의 주류 언어들의 위세에 눌려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소수언어 민족의 문학작품 번역사업도 시작했습니다. 본부의 이러한 사업 추진에 발맞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역시 한국 문학을 세계에 소개하는 사업을 추진했는데요. 1965년 8월 유네스코 회관에서는 ‘한국문학번역협회(가칭)’ 창립식이 열려 피천득, 주요섭, 백낙청 등 13명의 회원들이 한국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사이 일본은 탄탄한 번역 저변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세계에 알렸고, 1968년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죠. 반면 한국의 상황은 1971년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도 적당한 작품을 찾지 못해 추천을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을 정도로 척박했습니다(조선일보 1971년 2월 16일자 7면). 해당 기사는 한국 문학 번역을 지원하는 기관 설립을 요청하는 문학계의 목소리를 전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곳에서 한국 문학과 한국 문화를 해외에 알리려는 노력들이 끈질기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언급했는데요. 당시까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출판부는 『한국시(詩)선집』과 『한국사』를 번역해 내놓았고, 『한국시선집』 불어판과 『용비어천가』 번역도 진행하는 등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해외에 한국 문학의 역사와 현황을 알리는 데 힘써 왔습니다. 1961년 창간 이후 한국 문화를 영문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면서 수십 편의 단편소설과 200여 편의 시를 번역해 온 영문 월간지 『코리아저널』의 활약도 빠질 수 없습니다.
부족한 번역 기반과 한정된 재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국 문학 번역 사업을 추진해 오던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1970년대에 유네스코 신탁기금을 활용한 돌파구를 마련합니다. 신탁기금이란 사용처를 미리 지정하고 유네스코에 기부하는 기금인데요. 한국 정부는 1974년 6월에 한국문학번역기금 2만 달러를 유네스코에 신탁했고, 여기에 유네스코 본부가 2만 달러를 추가해서 한국 문학작품의 번역과 출판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기금을 통해 이후 10년에 걸쳐 영문 15종, 불문 5종 등 20여 권의 한국문학집이 해외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싹을 틔운 한국 문학 번역은 1992년 교보그룹의 문학 전문 재단인 대산문화재단이, 그리고 2005년 정부 주도로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되면서 전 세계 독자들의 머릿속에 한국 문학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알쓸U잡 돋보기🔍 I 우리 문화를 번역하는 일,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전 세계에 우리나나를 더 잘 알려야 할 필요성이 커지던 시기,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한국 문학 번역 사업은 단지 문학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부 및 유네스코 본부와의 협력을 통해 과거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일 외에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우리의 역사와 언어, 사상에 관한 영문 학술서적도 출간했는데요. 그 결과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을 사진과 함께 편집하여 출판한 『Traditional Performing Art of Korea』, 한국의 역사를 소개한 『The History of Korea』 등이 있고, 특히 한국 전통문화 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의 영문판 『Sourcebook of Korean Civilization』은 지금까지도 한국학 연구의 주요 성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83년에는 유네스코 국제문화진흥기금(IFPC)의 재정 지원을 받아 영문판 한국전통음악자료집을 발간함으로써 범패, 아악, 산조, 주악도, 진도씻김굿 등에 대한 수준 높은 학술 연구 결과물을 소개했는데요. 당시까지 이 시리즈는 1981년에 간행된 한국 음악 자료집인 『Source Readings in Korean Music』과 함께 한국 전통음악에 관한 가장 방대한 영문 학술 단행본으로 손꼽혔습니다.
“한국 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면서 하려는 일은 (제비 한 마리가 아니라) 봄을 부르는 일이다.”
곽효환 전 한국문화번역원장은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다룬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는데요. 커다란 문학상을 타는 것이 번역의 목표는 아니며, 한강 작가의 이번 수상 역시 “한국 문학이 거쳐야 할 관문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죠.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그리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전 세계의 소수언어 문학을 번역해 보존하고, 한국 문학과 문화의 전달에 애쓴 것도 그저 하나의 문화 사업 이상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언어는 우리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매개이며, 문학은 그 언어를 가장 세심하게 어루만져 담아놓은 그릇입니다. 한강 작가의 말대로 문학 역시 “생명을 파괴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문학이라는 그릇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하나의 그릇에서 열 개, 백 개의 그릇으로 옮겨 담는 번역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우리 마음 속에 평화의 씨앗을 옮겨 심는 일일 거예요.
2024년 12월의 겨울날,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유네스코 뉴스레터>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