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진 속 인물은 1896년 미 서부에 살던 아메리칸 원주민 ‘시애틀(Seattle)’족 족장의 딸 ‘앤젤린 공주(Princess Angeline)’입니다. 얼굴 가득한 주름,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깊고 검은 눈, 회한이 서려있는 듯 비뚜름하게 다문 입술…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속절없이 빼앗겨야만 했던 북미 원주민들의 가슴 아픈 역사와 사라져 가는 기억의 한 조각이 담겨 있는 것만 같습니다. 사진은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민속학자인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 Curtis)의 작품으로, 그는 1901년부터 1930년까지 30여 년간 미 서부 80여 개 부족을 방문해 원주민들의 신화와 민속, 사회구조, 종교, 노래, 언어 등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내용을 담아 펴낸 『The North American Indians』는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의 소중한 기록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커티스는 원주민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릇된 이미지를 만들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일조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는 원주민들의 순수함, 혹은 때묻지 않은 원시성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진 속에서 탁상시계 같은 현대적 문물을 지워버리기도 했고, 민속 춤을 추는 장면 등을 찍기 위해 모델료를 주고 원주민들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커티스의 양면적인 모습은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일의 어려움, 그리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오늘날 보호받고 있는 수많은 유산들은 지배자와 침략자의 시선 혹은 의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원주민들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 속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며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 파판(Chris Pappan)과 클리 베널리(Klee Benally)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통해 오래된 고정관념과 잘못된 이미지를 해체하고, 오늘날의 현실 속 원주민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산을 보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그것을 보호·관리하는 주체는 누가 되어야 타당한 것일까요? 2024년 6월,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열린 ‘제7차 비판적 유산연구협의회(Association of Critical Heritage Studies, ACHS) 국제컨퍼런스’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연구 결과들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기된 몇 가지 질문들을 정리해 보면서, 유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한층 넓혀 보기를 바랍니다.
+ 유네스코의 유산 보호 시스템, 이대로 괜찮을까?
회의에 참가한 다수의 학자들은 1972년 제정된,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세계유산협약)의 이행을 주도하고 있는 유네스코가 과연 인류 유산의 수호자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중의 눈에 유네스코는 세계의 유산 보호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멋진 조직으로 비치고 있지만, 실상 유네스코 내에서 유산은 회원국 간 평화를 깨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하고, 권위주의적인 거버넌스 체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역량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때문에 유산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그대학교의 토머스 슈미트(Thomas Schmitt) 교수는 대체로 관리 상태가 양호한 유산만을 선별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현재 유네스코의 유산 보호 시스템은 파괴나 훼손으로부터 취약한 유산을 보호하는 데 있어 체제 자체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슈미트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은 유산의 보호관리 책임을 유네스코 및 회원국에만 위임하는 대신, 사회 전체가 유산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참여와 협력의 기반을 쌓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정체성과 가치까지 포용할 수 있는 유산 보전 방법은 없을까?
뉴욕주립대학교의 세스 아수마(Seth Asumah) 교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삶을 서로 연결되어 순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아프리카 전통’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유산을 기념하고 보호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의 영광과 아픔, 현재의 도전과 기쁨, 미래의 희망과 불안을 모두 아우르는 포용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아수마 교수는 물질적으로 유산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유산과 관련된 모든 정체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차이를 결핍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회 정의와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바라보고자 하는 오늘날의 문화 다양성 논의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이를 통해 유산 연구는 단지 학문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포용적인 유산 해석과 보존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 유산 연구는 오로지 연구자들만의 몫일까?
스털링대학교의 루언 리스(Leuan Rees) 박사는 그동안 대부분의 유산 관리 접근 방식이 유산을 그저 건축 환경 안에 있는 물리적이고 유형적인 요소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리스 박사는 이와 같은 시각에서는 유산의 보호 및 보존의 초점이 관련 규제의 틀 안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일에만 머무를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유산의 연구와 관리에 더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최근 몇 년 동안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했음에도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유산 관련 계획 수립 및 이행 과정에서 도시 계획자와 유산 관련 전문가들은 물론,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나아가 지역 연구에 있어 연구자 중심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 중심으로 연구가 기획·실행돼야 하며, 연구의 방향성 역시 연구 결과나 질보다는 해당 커뮤니티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21세기 박물관의 새로운 역할은?
오르후스대학교의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교수는 다양한 도전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박물관의 역할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비 교수는 박물관이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산업혁명의 상징인 영국의 아이언브릿지 계곡으로부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변형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오늘날 기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산업혁명과 기후변화의 역사가 식민주의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의 박물관은 이러한 서구 중심적인 시각으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방식으로 유산을 다룸으로써 유산 보호라는 기존의 역할을 넘어 더 넓은 사회적·환경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산 보존이란 단순히 과거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지혜를 찾는 과정임을 새삼 되새기게 해 주는 지적이었습니다.
+ 유산을 통해 과거사를 극복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방법은?
이번 회의에서 탈식민주의와 관련된 연구들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자신의 출생지나 관련된 지역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유산의 보존과 재구성이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역사적 정의와 정치적 인식 변화를 포함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스위스 북서부 응용과학예술대학의 로베르타 버샤트(Roberta Burchardt)는 식민지 시대 유산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지배자’적인 시선에서 설명되고 기술된 이야기를 넘어, 기존의 체제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함한 다양한 관점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식민지의 역사적 부채를 인정하고 현대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직시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식민지 시기의 폭력과 불의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게 될 때, 유산 보호는 비로소 건축물이나 유물의 보존을 넘어, 그것들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 회의를 마치며
4일 간 학회에 참여하면서 접한 강렬한 질문들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역사와 유산’들을 둘러싼 여전히 식지 않은 뜨거운 논쟁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듯, 유산은 그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현재이며,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입니다. 유산 보호가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설계하는 일이 될 수 있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만드는 것은 단지 유네스코나 회원국 정부만의 책임이 아니라, 유산과 역사의 당사자이자 목격자이자 서술자인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전진성 연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