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의 우주 로켓은 매일같이 하늘로 올라가고, 나사(NASA)의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은 우주의 끝, 혹은 우주 탄생의 순간을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려 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가깝게는 지구 궤도와 달에서부터 멀게는 화성과 목성, 토성의 위성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향해 다양한 탐사선을 쏘아 올리고 있어요. 그중엔 이웃나라 일본에서 올해 말 발사될 예정인 달착륙선 ‘하쿠토-R 미션2’도 있어요. 여기에는 달 표면을 돌아다닐 소형 탐사체가 실리는데요. 이 탐사체에 유네스코가 정말기술기업 배럴핸드(Barrelhand)와 함께 만든 ‘메모리 디스크(Memory Disc)’가 실린다는 놀라운 사실! 평화의 염원을 담은 유네스코 헌장 첫 구절과 다양한 언어, 그리고 예술작품이 새겨진 이 디스크는 앞으로 영원히 달 표면에 남아 인류 문명의 기억을 간직하게 될 거예요.
+ 유네스코와 달의 첫 만남
‘메모리 디스크’라는 이름답게, 유네스코가 달에 건네는 첫 인사라 할 수 있는 디스크에는 지구의 위치에 관한 정보와 함께 인류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들이 새겨져 있어요.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장자리에 뚜렷하게 보이는 문구, 바로 유네스코 패밀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유네스코 헌장의 첫 소절이에요.
“Since wars begin in the minds of men, it is in the minds of men and women that the defences of peace must be constructed.”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
이 문구는 아래에 작은 글씨로 무려 275개의 언어로도 적혀 있는데요. 인류 문화의 발전을 위해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문화를 담는 그릇인 언어의 다양성도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해 온 유네스코의 신념이 담겨 있는 부분이에요. 마침 올해는 유엔이 2022년부터 2032년까지로 설정한 ‘세계 토착어 10년(Indigenous Languages Decade)’의 세 번째 해이기에 그 의미도 더욱 각별하죠.
뿐만 아니라 디스크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불어 원문 및 그림과 함께 새겨져 있고, ‘모나리자’ 같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에서부터 별로 유명하지 않은 소수 문화권 작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회화 작품 100점도 그려져 있어요.
+ ‘저장’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새겨넣은 이유
유네스코 헌장 첫 소절을 275개 언어로 ‘새겨’ 놓았다는 표현에서 이미 눈치챈 분도 계시겠지만, 이 모든 내용은 디스크에 ‘저장’된 것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각인이 되어 있어요. 디스크의 크기는 지름이 19mm. 동전 한 개 크기에 불과하죠. 모든 내용을 이 작은 크기의 디스크에 새겨넣기 위해 정밀기술기업과의 협업이 필요했고, 배럴핸드의 ‘나노피쉬(NanoFiche)’라는 신기술이 여기서 그 능력을 발휘했어요.
손톱만한 USB메모리에 어지간한 도서관의 모든 자료를 저장할 수 있는 세상이 된 지가 언젠데, 방망이 깎는 노인도 아니고 왜 디스크에다 일일이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수고를 하느냐는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배럴핸드의 설명에 따르면, 혹독한 우주 환경 속에서 수백만 년 이상 정보를 보존하는 데는 정보를 직접 새겨넣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해요. 인류의 조상이 수천 년 전 돌기둥에 상형문자를 새기던 그 원시적인 기술이 달에 착륙선을 보내고 인간과 인공지능이 자유롭게 말을 섞는 21세기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잊혀져가는 모든 문화도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유네스코의 관점과도 맞닿아 있어요.
방사선 동위원소처럼 반감기가 있지도 않고, 산소와 반응해 산화되지도 않는 니켈 디스크에 새겨진 이 정보들은 달에 건네는 유네스코의 첫 인사이자, 평화를 향한 70여 년 전의 초심을 절대 잃지 않겠다는 영원한 다짐이기도 해요. 한 땀 한 땀 새겨진 이 다짐은 대기가 없는 달 표면을 수시로 때리는 태양 방사선도, 급격한 온도나 자기장의 변화도 꿋꿋하게 견디면서 설령 지구에서 인류 문명이 사라지더라도 끝까지 남아 누군가에게 우리의 기억을 전할 거예요.
알쓸U잡 더보기 | ‘덕질’이라면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만만치 않죠
30여 개 언어로 『어린왕자』 들어보기
어떤 특정한 분야에 푹 빠진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御宅)’가 변형된 유행어인 ‘덕후’, 그리고 이런 덕후들이 열심히 하는 행위를 말하는 ‘덕질’. 이 유행어를 차용해 표현한다면 유네스코는 지난 70여 년간 평화와 관용, 그리고 다양성 보전을 위해 교육·과학·문화 영역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덕질’을 해 온 조직인데요. 어쩌면 평화에 대한 그 염원과 애정을 또렷하게 새긴 디스크를 달에 보내 영구히 보존한다는 것이야말로 그런 덕질의 결정판, 즉 ‘성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유네스코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활력과 열정을 자랑하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또한 평화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덕질에는 그 누구 못지않은데요. 이번에 달에 가는 메모리 디스크에 실린 『어린왕자』를 보면서 몇 년 전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선보였던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떠올랐어요. 바로 전 세계 30여 개 언어를 쓰는 원어민들이 함께 만든, ‘세계 여러 언어로 만나는 어린왕자’ 오디오 클립이에요.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2019년 ‘세계 토착어의 해’와 2월 21일 ‘세계 모어의 날’을 맞아 다양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모어 보호의 중요성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 오디오 클립을 만들어 보았는데요. 여기에는 힌디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아르메니아어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언어로 원어민들이 낭독한 어린왕자의 일부가 담겨 있답니다. 언어의 보전과 다양한 언어의 소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 들어 보세요!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