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화제를 낳고 있는 넷플릭스의 드라마 ‘삼체’, 혹시 보셨나요? (혹시 안 보셨더라도 스포일러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번 이슈쿠키는 드라마와 원작소설 소개 페이지에 나와 있는 내용까지만 다루고 있으니까요.) SF문학계 최고 권위를 가진 휴고상과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을 석권한 중국 작가 류츠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불안정한 자신들의 세계 대신 지구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으려는 외계문명(삼체인)에 맞선 지구인들의 사투를 그리고 있는데요. 많은 흥미로운 서사들이 그렇듯, 수 세기가 넘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이야기는 한 인간의 어떤 선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불우하고 상처받은 중국인 천체물리학자, ‘예원제’의 선택이지요.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에서 수많은 문화유산과 지식, 그리고 지식인들이 희생당한 직후인 1977년, 예원제는 중국 내륙 오지의 비밀 연구기지에 앉아 우주공간에서 들려오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전 몇 년간 수 없이 반복됐던 일과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잡음만 듣게 될 것 같았던 날이었죠. 하지만 바로 그때, 깜깜한 하늘을 가로질러 또렷한 신호가 들려옵니다. 잡음이나 오류가 아닌, 분명한 메시지의 패턴을 담은 그 신호를 해독한 예원제의 눈앞에는 매우 당혹스런 메시지 하나가 나타나죠.
“경고한다.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는 순간 그곳의 위치가 파악되어 당신들의 세계는 점령당할 것이다.”
이 소름끼치는 메시지 앞에서, 예원제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전파 발신원을 향해 다음과 같은 답을 보냅니다.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 그는 왜 빌런이 되어야만 했을까
예원제는 대체 왜 그랬을까요. 드라마와 원작소설에 그 이유가 묘사되는데요. 예원제에게는 이토록 인류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응답 메시지를 보낼 이유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에 걸쳐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그 배경이었죠. 인간이 꿈과 가능성과 생각을 가진 주체가 아닌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예원제의 인생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그는 바로 눈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봤고, 어머니의 영혼이 텅 비어버린 것을 목격했고, 새로운 지식과 이론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꿈을 흙먼지 속에 파묻어야 했죠. 그에게 이 세상은 광기와 폭력으로 가득한 곳이었고, 인간이란 서로를 적대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생각이 전혀 없는 악의 현현(顯現)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도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폭력,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이 세상의 구조. 그것이 예원제를 ‘흑화(어떤 캐릭터가 냉혹하고 잔인하게 변화하는 상태를 일컫는 인터넷 용어)’하게 만든 결정적 동기였습니다.
“당신들을 돕겠습니다.”
그 누구와도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예원제가 마침내 내민 손이 향한 곳이, 다름 아닌 지구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외계인이라는 이 아이러니는 독자와 시청자의 마음에 오싹한 그늘을 드리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럴 만 했네’라고 그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을 잃은 슬픔과 자아를 부정당한 원통함은 급격한 변화나 극단적 행동의 가장 큰 동기이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그저 고통과 증오와 원한만이 예원제의 선택 뒤에 도사린 감정의 전부일까요? ‘전지적 유네스코 시점’에서 다시 그를 가만히 지켜보면, 그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외로움이란 단지 ‘고통과 상실’의 결과로서의 외로움은 아닙니다. 정치철학자 김만권 교수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예원제의 외로움은 위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외로움과 결이 닿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외로움이며, 그것의 본질은 “어려울 때 손 내밀 사람,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데이비드 리스먼의 ‘외로운 군중’이란 표현에서 볼 수 있듯, 함께 있으나 홀로 남은 존재의 감정이 외로움이다. 홀로 남겨진 존재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의문을 품게 되고,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혐오를 자신 안에만 담아둘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 혐오는 반드시 타인을 향해 간다. 그 혐오는 차별이 자라나는 토대가 되고 종래에는 연대가 필요조건인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다.
— 김만권, “외로움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한겨레, 2021.5.10.
사실 1977년의 공산주의 중국에서 살고 있는 예원제에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외로움’은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를 끝내 ‘흑화’하도록 만든 외로움이란 자신의 세계로부터 느낀 외로움이자, 전 인류로부터 받은 외로움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라며 세상의 파괴자에게 점령과 지배를 간청하는 예원제의 모습에서, (외로움이란) “비전체주의 세계에서 인간이 전체주의적 지배를 준비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언급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 세상의 ‘예원제’들에게 인류애가 있었더라면
인류애를 포기하게 만든 예원제의 경험은 오로지 가상의 이야기이며, 예원제만의 특별한 경험일까요? 사실 서로 모함하고 경쟁하고, 약자를 짓밟고 속여 온 ‘어둠의 역사’를 우리 모두의 공통된 과거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원제의 경험을 인류 전체의 경험으로 확장시켜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죠.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인종 혹은 신분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구분짓고 차별을 정당화했던 인류의 역사,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탄압하고 보복과 재보복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재 지구 곳곳의 상황. 이 모든 것들을 되새겨 보면 인류는 과거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현실 속 예원제’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데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외로움’의 굴레에 빠진 현실 속 예원제들은 자신과 세상을 혐오하고 진실과 상식을 부정하며 자신 외의 누군가를 ‘악’으로 지목해 줄 위험한 사상, 혹은 위험한 상대에게 자신의 미래를 의탁하려 할지 모릅니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소수자와 외부인을 향한 적대심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정치인과 정당이 약진하고 있습니다. 강자의 약자를 향한, 혹은 주류의 비주류에 대한 혐오와 테러는 온·오프라인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개인의 좌절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불평등의 구조는 점점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의 숨가쁜 발전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에 대한 실존적 고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요소는 점점 더 많아지고, 점점 더 자주 우리 각자의 실제 경험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미 반 세기 전에 한나 아렌트도 외로움이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세상은 이전처럼 그대로 굴러갈 것이고 세상의 지속에 우리는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외로움, 즉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서 버려졌다는 경험을 실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예원제들이 자신의 존재가 세상의 지속과 무관하다는 자기혐오의 감정 대신, 지구라는 행성의 똑같은 시민으로서 서로 연대하고 포용하는 기억을 가질 기회는 없는 것일까요? 혹은 그러한 사람들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그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기회는 없는 것일까요? 유네스코는 세계시민교육(Global Citizenship Education, GCED)이라는 교육의 창이 앞으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주고, 새로운 세상에 대응하는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시민교육이란 ‘학습자들이 지식과 기술뿐만 아니라 관용과 존중, 그리고 지역이나 국가 단위를 넘어 지구라는 단일한 세상에 대한 소속감을 고양하는 태도를 갖추고 인간의 권리와 평화를 지키는 궁극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게 해 주는 교육’을 말하는데요. 유네스코는 이러한 비전을 교육의 각 단계에서 구현할 때 “모든 연령의 학습자들이 윤리적이고 공감하며 서로 존중하는 인간으로 성장해 급격히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고, 복잡한 도전과제와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서로에게 공감하며,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단일한 세계’로서 이 지구의 미래를 함께 가꿔 나갈 수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라면 아무에게도 손 내밀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나의 비통함을 전가시킬 대상을 애써 찾지 않아도 될 것이고,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큰 권력을 쥐어주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세계를 ‘접수’하러 오는 외계문명이요? 까짓 것, 어디 한번 와 보라지요.
+ 우리 안의 ‘삼체 문제’도 해결하자는 제안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삼체 문제(three-body problem)’는 고전역학을 다루는 물리학의 한 문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서로 중력의 영향을 주고 받는 세 개의 물체 간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일반해(一般解, general solution)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인데요. 따라서 작품 속에서 세 개의 항성이 만드는 예측 불가능한 재앙을 반복적으로 겪는 항성계에 거주하는 ‘삼체인’들은 한 개의 태양을 중심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구를 노리는 것이죠. 작품에서 묘사된 삼체 세계는 우리의 눈엔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세 개의 태양이 매우 가까이서 동시에 뜨면 온 세상은 불바다로 변하고, 셋 모두가 멀리 궤도를 벗어나 사라지면 세상에는 끝도 없는 밤과 빙하기가 찾아옵니다. 이 모든 일은 예측할 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거나 사라지고, 따라서 이 문명의 지상과제는 번영하는 것(thrive)이 아닌, 그저 살아남는 것(survive)뿐입니다. 문화도 없고, 음악과 문학도 향유하지 못한 채 마치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오로지 생존을 위한 기술만을 발달시켜 온 이 문명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독자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유네스코 패밀리라면, 어쩌면 세계시민을 더욱 확장한 ‘우주시민’의 시각에서 이들과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진 않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침 유네스코가 스스로 밝히는 세계시민교육에서 유네스코의 역할 또한 “모든 연령의 학습자들이 21세기에 살아남는 것뿐만 아니라 번영하도록(thrive and survive) 해 줄 교육의 큰그림을 그려보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원작자는 완전한 상호 믿음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지만, 작품을 나만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또한 문학을 대하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즐거움 중 하나일 거예요.
바로 그런 측면에서 이 외계 문명을 괴롭히는 삼체 문제는 어쩌면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문제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극히 예측이 어려워 보이는 세 물체의 경로는 21세기에 우리 인류가 직면한, 정말 풀기 어려운 세 가지 문제의 비유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 가지 문제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 윤리 없이 질주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오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오로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능력만을 가르치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 ▲그리고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을 도무지 고민하려 하지 않는 대화와 포용의 부재입니다. 이 모두는 바로 지금 유네스코가 가장 천착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단독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이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지 않고는 기후위기 해결도, 지속가능발전 달성도, 나아가 항구적인 평화의 정착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물리적 삼체 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한 외계인들은 지구를 향한 400년간의 원정길에 올랐는데요. 이와 달리 현재 시점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보금자리란 지구, 이 작고 푸른 행성 하나뿐입니다. 이 위에 200여 개의 국경을 긋고 각자도생을 모색하는 것은 우주적 의미에서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유네스코가 이야기하는 세계시민교육이란 바로 이 ‘지구’라는 단 하나의 세계에 그어놓은 200여 개의 단절, 그리고 모두를 외롭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 우리 미래를 ‘함께’ 고민해 보자는 용기 있는 초대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플랜 B’, 즉 또 하나의 지구(planet B)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엄청 근엄하고 진지한 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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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제가 겪었던 비극보다 훨씬 더 소설 같은 비극이 실제로 일어났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끝자락을 향해 가던 때인 1974년, 그리고 체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희생된 베트남전이 막을 내리던 때인 1974년, 공교롭게도 바로 그해에 유네스코는 「국제이해, 협력, 평화를 위한 교육과 인권, 기본 자유에 관한 교육 권고」라는 긴 이름의 권고를 채택합니다. 일명 ‘1974년 권고’, 혹은 ’1974 국제이해교육 권고’로도 불리는 이 권고는 ‘인간의 마음에 평화의 방벽을 쌓기 위한’ 유네스코의 설립 이념을 교육을 통해 전 세계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기념비적인 국제규범이라 할 수 있는데요. 유네스코에 따르면 그것은 “사상 처음으로 평화, 국제 이해, 인권, 기본 자유와 교육을 한 데 묶은 규범 체계”였습니다. 또한 이 권고는 “모든 교육이 전쟁과 폭력, 차별과 혐오,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인권과 기본적 자유, 정의로운 평화, 사회 정의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명시했고, 따라서 교육이 문해력과 수리력을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차이를 존중하며 ‘범지구적 상호 의존 관계’를 맺고 있는 인류의 협력과 평화를 모색할 도구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세계시민교육(GCED)과 지속가능발전교육(ESD)으로 더욱 구체화되면서 교육 현장에 뿌리내리게 되었고, 권고가 채택된 지 거의 반 세기가 흐른 뒤인 지난 2023년에 유네스코는 각 회원국들과 함께 그간 이 분야에서 누적된 새로운 가치를 담아 이 권고를 개정했는데요. 이번 개정을 통해 해당 권고는 「평화 인권, 국제이해, 협력, 기본적 자유, 세계시민성,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교육 권고」로 이름을 바꾸었고, 바뀐 명칭에 포함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세계시민교육과 지속가능발전교육은 21세기 변혁 교육(transformative education)을 주도하는 주요 접근법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APCEIU)과 함께 이 권고의 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요. 그 과정과 결과, 소회가 궁금하다면 임현묵 APCEIU 원장의 글도 한번 읽어보세요!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