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제4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전 세계 회원국들은 「유네스코 오픈 사이언스 권고」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약 2년 3개월이 흐른 지금, 개방과 공유, 그리고 협력을 통해 더욱 공평하고 효율적인 21세기의 과학 발전을 이룩하자는 그 다짐에는 얼마나 진척이 있었을까요? 유네스코가 권고 채택 이후 처음 발간한 보고서 『Open Science Outlook(오픈 사이언스 전망)』은 약간의 희망적인 소식과 더불어, 우리 앞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쓸U잡 키워드> 오픈 사이언스? 과학을.. 열어..?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는 단어 그대로 과학 지식을 폭넓게 개방하고 과학 연구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며 그 결실을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정 국가나 연구소가 비공개로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독점적으로 활용해 수익을 얻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면, 오픈 사이언스에는 과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다양한 참여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댐으로써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21세기의 과학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2021년 유네스코는 수 년간의 연구와 협의 끝에 폐쇄적 과학 모델 대신 공유와 협력과 개방을 근간으로 한 오픈 사이언스로의 전환 원칙을 담은 「오픈 사이언스 권고」를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 조금씩 낮아지는 장벽
보고서는 지난 2년 사이에 오픈 사이언스와 관련된 정책과 전략, 행정 체계를 도입한 국가가 11개국(남아공, 라트비아, 레소토, 루마니아, 사이프러스, 스페인,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콜롬비아)으로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폭발적인 성장’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숫자입니다. 하지만 오픈 사이언스가 연구 과정과 연구 인프라, 참여 인력 및 과학지식체계 전반을 아우르는 새로운 행동을 요구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는 미약하다고만 볼 순 없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고무적인 움직임은 또 있습니다. 오픈 사이언스의 ‘출발점’, 혹은 ‘첫 발’이라 할 수 있는 ‘오픈 액세스(open access)’, 즉 유료 구독 등의 장벽 없이 폭넓은 접근권을 보장하는 과학 출판물의 수가 최근 10년 새 눈에 띄게 늘었다는 사실입니다. 2021년에는 전체 과학 출판물의 거의 절반이 오픈 액세스로 공개됐다고 합니다. 다만 보고서는 이러한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전체 공개 출판 및 데이터 저장소의 85%가 서유럽과 북미에 편중돼 있고 아프리카 및 아랍 지역은 각각 전체의 2%와 3%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별 각개약진을 넘어, 오픈 사이언스의 본래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체적인 진전을 이뤄낼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풍선효과’를 막아라
보고서는 오픈 액세스 출판물의 증가 이면에 미처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강남 아파트값을 잡기 위한 강력한 부동산 정책이 강남 주변 지역 아파트값을 끌어올리듯, 점점 늘어나는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몇몇 학술 저널들이 독자 대상 유료 구독을 없애는 대신 저자를 대상으로 일종의 출판료(publication fee)를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2021년에 발간된 『유네스코 과학 보고서』에서도 지적된 것으로, 개발도상국 이하 국가의 과학자들이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알리는 데 새로운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과학 지식의 공유를 가로막는 벽이 위치만 바꿔서 다시 세워진 셈입니다.
이러한 부작용이나 저항(?)에도 이유는 있습니다. 과학 출판물을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관련 지적재산권 등을 관리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며, 마찬가지로 막대한 자금과 인력과 비용을 들여 수행한 연구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오픈 사이언스가 이러한 장벽을 극복하고 단순한 연구 출판물의 무료 공개를 넘어 연구 시설과 기자재의 공유, 과학에 대한 사회적 참여 및 대화의 확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과학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합니다. ‘경쟁과 독점’의 20세기적 가치보다, ‘개방과 협업’의 21세기적 가치가 더 큰 보상과 더 골고루 돌아가는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너무 거창한 희망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21세기 인류 최대의 재앙이었던 코로나19 펜데믹 과정에서 과학계의 개방과 협력이 이뤄냈던 눈부신 성과를 돌아본다면, 그것은 순진한 꿈이 아니라 근거 있는 분석의 산물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유네스코가 오픈 사이언스의 실현을 향한 앞으로의 발걸음에 더 큰 힘이 실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알쓸U잡 더보기>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오픈 사이언스의 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인류가 고통받던 때,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하루라도 빨리 백신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계는 이를 국경을 초월한 유례없는 협력을 통해 달성했습니다. 2020년 OECD가 발간한 코로나바이러스 정책 대응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사스(SARS)가 창궐했을 때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데 5개월이 걸렸던 반면, 코로나19 때는 불과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는 이것이 전 세계 117개 과학 및 보건의학 관련 조직들이 오픈 사이언스에 참여해 데이터와 연구 자료를 공유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번 유네스코 보고서 역시 “2021년 중반 현재 전체 코로나19 관련 논문의 85%가 오픈 액세스로 나와 있다”고 설명하며, 이는 같은 기간 전체 과학 논문의 40% 가량이 오픈 액세스였던 것과 큰 차이라고 했습니다.
엔데믹을 맞이한 지금, 보고서는 “이와 같은 노력이 앞으도 지속될지는 불투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논문들이 공식적인 오픈 라이선스를 채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료로 공개가 되었을 뿐으로,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유료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처음이 제일 어렵다’고 했던가요? 지금 우리 앞에는 모두의 지혜와 협력을 필요로 하는 과제가 산적해 있고, 이들 과제가 더 큰 위기를 불러오기 전에 전 세계는 과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의 그 성과를 되새기면서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과학’ 대신 ‘함께 연구하고 연대하는 과학’을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