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18년도 노벨상 수상자 중에는 기후변화와 지속가능발전, 성평등과 여성 인권, 세계 평화 등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가치와 관련된 수상자가 특히 많았다. 물리학상, 경제학상, 평화상의 영예를 안은 이 수상자들은 때로는 불굴의 용기와 끈기로, 때로는 날카로운 통찰과 혜안으로 인류가 평화를 구축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가는 데 힘을 보탰다. 레이저를 활용해 극도로 작은 물질이나 극도로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나는 현상을 파악하는 데 기여한 도나 스트릭랜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경제 정책의 틀을 마련한 윌리엄 노드하우스,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돕고 가해자 처벌을 위해 노력한 드니 무퀘게와 나디아 무라드 등의 면면을 살펴보며, 유네스코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설렜던 이유를 전한다.
빛으로 만들 미래, 도나 스트릭랜드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빛, 특히 레이저를 활용해 자연의 진실을 밝히는 데 한 발짝 다가간 세 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미국 벨연구소의 아서 애쉬킨(Arthur Ashkin)박사의 광학 집게(optical tweezers) 연구, 사제지간인 프랑스 에콜폴리텍의 제라르 무루(Gérard Mourou) 교수와 캐나다 워털루대 도나 스트릭랜드(Donna Strickland) 교수의 고강도·초단광 펄스 발생 기술 연구는 극도로 작은 물질이나 극도로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나는 현상을 파악하는 기술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상자들의 연구는 ‘레이저 손가락’을 이용해 분자단위의 작은 물질과 바이러스까지 붙잡아 옮기는 등,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술을 현실화하는 길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수상자를 선정한 스웨덴 왕립과학원도 이들의 연구가 “산업 및 의학 분야의 발전에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 수상자 중 도나 스트릭랜드 교수는 무려 55년만에 탄생한 첫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1903년 마리 퀴리(Marie Curie), 1963년 마리아 괴퍼트-메이어(Maria Goeppert-Mayer)에 이어 사상 세 번째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된 스트릭랜드 교수는 “여성들은 정말 먼 길을 달려왔다”며 여성 과학자로서 자신의 수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스트릭랜드 교수는 “이번 수상을 모든 여성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가 바로 여기 있다는 사실 때문이며, 여성들이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길 희망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 역시 “이번 수상은 모든 여성 과학자들에게 힘을 주는 소식인 동시에, 다양성이야말로 혁신을 이끌어내는 동력임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115년 동안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단 세 명뿐이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과학 분야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재능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고 있다. 2015년 발간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UNESCO Science Report)는 전 세계 연구업계 종사자 중 여성 연구자는 30% 미만이고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단 3%만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리며 과학계의 성별 불균형을 지적한바 있다. 보고서는 “이름 높은 대학일수록, 더 높은 명성이 보장된 보직일수록 여성 비율이 줄어든다”며, “이같은 편향은 연구자금 모금과 논문 게재 횟수 등, 연구자의 경력 및 성과와 직결되는 모든 분야에서 제약으로 작용한다”고도 지적했다. 이는 결국 주제 선정에서부터 방향까지 대부분의 연구 활동이 남성 중심으로 이뤄짐으로써 사회 전체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보고서는 우려했다.
유네스코가 각 분야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성별 편중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다. 유네스코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매년 유네스코-로레알 여성과학자상(L’Oréal‒UNESCO for Women in Science Prize)을 시상해 왔고, 지난 20년 동안 이 상을 받은 102명의 여성 과학자들 중에서 3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기도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받게 되면서 근대 과학이 활짝 꽃피웠듯, 더 많은 여성이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낼 수 있을 때 21세기의 과학도 한 발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55년 만에 여성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받던 날, 아줄레 사무총장이 “다양성이야말로 혁신을 낳는 동력인 만큼,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풀어줄 과학, 신기술, 혁신에 공헌할 더 많은 명석한 두뇌들이 필요하다”고 밝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2℃ 컨센서스’의 밑그림, 윌리엄 노드하우스
물리학 분야에서 무척 오랫만에 나온 여성 수상자 소식이 다양성과 성평등의 관점에서 유네스코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는 지속가능발전과 기후변화에 대한 유네스코의 오랜 노력을 돌아보게 해 준 또 하나의 희소식이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폴 로머(Paul Romer) 뉴욕대 교수와 함께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am Nordhaus) 미국 예일대 교수를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발표하며, 노드하우스 교수가 기후변화를 거시경제분석에 통합시킨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했다. 이와 함께 기술 혁신을 거시경제학적인 분석으로 풀어낸 폴 로머 교수의 연구도 소개하고, “(두 학자의 연구가) 오늘날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시급하고 근본적인 질문인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노드하우스 교수의 이번 수상이 유네스코에게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의 연구가 지난 2016년 전 세계 195개국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파리 협정’(Paris Agreement)을 통해 합의한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더 나아가 온도상승 폭을 1.5℃ 이하로 제한하자’라는 정책 목표의 밑바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노드하우스 교수는 1977년에 발표한「경제 성장과 기후: 이산화탄소 문제」라는 논문에서 10~20년 이후의 평균 기온 상승폭이 2℃를 넘지 않도록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조절해야 한다고 처음 주장했다. 기후 변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적지 않던 시절, 노드하우스 교수가 내놓은 일련의 연구는 이후 여러 단체와 국제 기구가 ‘탄소세’(carbon tax) 등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인간과 생물권 프로그램’(Man and Biosphere Programme, MAB)등의 주요 사업에 파리 협정의 실천 목표를 담아내고, ‘기후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Changing minds, not the climate) 전 세계가 즉시 단호하게 나설 것을 호소해 온 유네스코에게도 노드하우스 교수의 이론과 연구는 큰 힘이 되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지난 10월 8일, 유네스코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내놓은 최신 보고서인 『지구 온난화 섭씨 1.5도』(Global Warming 1.5°C)의 내용을 소개하며 노드하우스교수의 수상 소식에 ‘유네스코다운’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온도 상승 제한폭이 섭씨2도가 아니라 1.5도여야 하는 이유를 담은 보고서를 통해, 유네스코는 바로 노드하우스 교수가 학문의 영역에서 그랬듯,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집에서, 지역 사회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언제나 ‘지속가능한 선택’을 고민할 것을 주문했다.
침묵보다 용기, 드니 무퀘게와 나디아 무라드
그 어느 나라보다 평화를 소망하는 우리나라 국민에게 노벨 평화상은 매년 특별한 관심을 끄는 분야다. 인간의 마음에 평화의 방벽을 세우고자 하는 유네스코 역시, 우리만큼이나 특별한 마음으로 매년 평화상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왔다. 올해 우리 국민과 유네스코로부터 특별한 축하를 받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드니 무퀘게(Denis Mukwege) 박사와 이라크 북부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출신 여성인 나디아 무라드(Nadia Murad)다. 두 사람은 전쟁, 혹은 분쟁 지역에서 만연한 성폭력 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전례 없는 용기를 발휘한 실천가들로, 성폭력은 침묵이 아니라 치열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움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수상자를 발표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역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향한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전쟁 범죄에 맞서는 한편,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되찾아주기 위해 노력했다”며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드니 무퀘게 박사는 1998년 군벌세력 간 내전으로 전 국토가 신음하던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 판지(Panzi) 병원을 설립해 성폭력을 당한 수많은 여성과 아이를 치료했다. 지난 20년 간 성폭력은 물론 끔찍한 신체 훼손을 당해 판지 병원을 거쳐간 콩고 여성과 아이들 수는 4만 명이 넘는다. 무퀘게 박사는 자신의 역할을 피해자들에게 치료와 보살핌을 제공하는데 한정하지 않고, 그러한 폭력을 가한 가해자들이 제대로 죗값을 치르도록 하기 위해서도 온 힘을 쏟고 있다.
지난 2016년 11월 25일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유네스코『꾸리에』와 인터뷰를 한 무퀘게 박사는 “(분쟁 및 전쟁 지역에서) 성폭력은 그저 성적 충동만이 아니라 전쟁 무기로 조직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국제사회가 이같은 만행을 전쟁 범죄로 철저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퀘게 박사는 “무장 단체들이 ‘돈줄’이 되는 주요 광산 지역을 영구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이러한 짓을 저지르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금과 콜탄(coltan, 핸드폰 등 주요 전자 제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인 ‘탈탄’의 원석) 등의 생산 흐름을 공개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드는 것도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무퀘게 박사는 2016년 유엔에 ‘면책은 없어야 한다’(No to impunity)는 청원을 넣어 국제 사회가 콩고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침묵하지 말 것을 호소했고, 전세계 200여 단체가 여기에 동참하면서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617명의 가해자를 명시한 범죄자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침묵은 해결책이 아니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무퀘게 박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나디아 무라드는 중동의 ‘이슬람국가’(IS)가 자행한 조직적 성폭력의 피해자이면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을 향한 중동 사회의 부당한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당한 만행을 전 세계에 고발한 집념의 여성 운동가다. 2014년, 3천여 명의 야지디족 여성들과 함께 IS에 납치돼 조직적인 성폭력과 고문을 당한 무라드는 3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한 뒤 유엔에서 자신이 당한 모든 일을 증언하고 IS를 민족 학살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다. 이처럼 무라드가 침묵 대신 선택한 당당한 외침과, 숨어드는 대신 선택한 용기 있는 행동은 전 세계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이에 유엔은 2016년 23살의 무라드를 유엔의 첫 번째 ‘인신매매 생존자들의 존엄을 위한 친선대사’(Goodwill Ambassador for the Dignity of Survivors of Human Trafficking)로 임명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전쟁 혹은 분쟁 지역에서의 성폭력을 전쟁 범죄이자 국제 평화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한 ‘1820 결의안’(Resolution 1820)을 통과시킨 지 10주년이 되는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의 인권이지켜질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평화로운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네스코가 이번 수상을 “유네스코가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여성과 소녀의 권익 보호를 위한 강력한 신호”라며 반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 역시 “분쟁지역에서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용기와 헌신을 보여준 이들의 활동이 평화를 위한 유네스코의 노력에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여성 권익 보호와 성평등 실현이 지속적인 평화 구축의 중요한 전제 조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편집국장
참고자료
nobelprize.org 각 부문별 노벨상 수상자 발표 자료
unesco.org “Donna Strickland, First Woman to Win Nobel Prize in Physics in 55 Years”, “Act Now, Act Boldly!”, “Nobel Peace Prize 2018: ‘A Strong Signal for the Defence of the Rights of Girls and Women in Line with UNESCO’s Priorities’”, “Interview with 2018 Nobel Peace Prize Laureate Denis Mukwege a Life Dedicated to Victims of Sexual Assau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