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관광객 가득찬 거리, 문화예술 중심지 옛 모습 일부 복원
명동은 조선시대 지역 이름인 ‘명례방(明禮坊)’에서 왔다. 명례방은 예가 밝은 동네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예’가 떨어져나가고 ‘명’자만 남았는데, 이름대로 한국 최고의 번화가이다. 1894년 들어선 명동성당은 명동의 또 다른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명동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주거지였던 충무로의 영향으로 상업지역으로 급부상했고, 해방 이후에는 명동에 문인, 화가, 연극인, 음악인, 영화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1960년 말부터 불기 시작한 명동의 재개발로 명동의 예술인들은 갈 곳을 잃어갔고, 1973년 국립극장마저 남산으로 이전하여 문화예술의 분위기는 사그라들었다.
1970-80년대 명동은 문화예술을 대신하여 패션과 유행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싹트기도하고,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의 성지가되기도 했다.
1990년대 명동은 저가 보세옷집이 넘쳐나는 시기를 거쳐, 백화점과 유명브랜드 매장, 화장품 가게, 그리고 일본,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로 채워졌다.
2000년대 명동은 다시금 꿈틀거리고 있다. 명동에는 매일 1백 만명이 넘는 유동인구가 방문하고,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 1,200만 명 가운데 70%가 명동을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명동예술극장이 재개관하고, 유네스코회관에 난타전용극장이 자리잡으면서 문화예술 중심지로서의 명동의 예전 모습을 일부 회복하고 있다.
한편 서울 중구 도로명주소위원회는 한국 유네스코 가입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10년 유네스코회관이 자리하고 있는 명동길(명동 눈스퀘어~ 명동 가톨릭회관, 폭 15m, 길이 533m)을 ‘유네스코길’(명예도로)로 지정한 바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2014년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60년간 유네스코 활동의 중심이었던 명동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명동이야기』(2012년, 서울역사박물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