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복 외교통상부 의전기획관(전 유네스코대표부 공사)
2012년 11월 유네스코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956년 한국에서 사용되었던 교과서를 유네스코에 기증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유네스코 지원을 받아 인쇄, 제작된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이 유엔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인 반전인가?
한국은 원조를 받던 최빈 개도국에서 원조를 공여하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첫 번째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발전 과정에서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았던 만큼 되돌려 줄 때가 된 것이며, 유네스코 외교에 있어서 한국의 역할도 한 단계 격상되어야 한다.
유네스코의 재정 위기
2011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제36차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의 유네스코 회원국 가입 결의안이 회원국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팔레스타인 가입이 결정될 경우 미국은 유네스코의 모든 재정에 대한 기여가 중단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의 열망과 아랍국가들의 지원 의지를 굽힐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독립 국가 지위를 얻는 데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는 성과를 거둔 반면에, 유네스코로서는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더 큰 재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사업의 대폭 축소를 통해 살아남기 전략을 짜고 있다. 유네스코는 2012-13년 예산을 약 30% 삭감하고 긴급기금을 설치하여 회원국들의 자발적 기여를 호소하는 등 자구 노력을 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당초의 2012-13년 예산 규모 653백만불에서 188백만불을 축소한 464백만불의 사업예산안 (36 C/5)에 맞추어 사업 실행계획을 수립하였고, 근본적 조직 개혁을위한 로드맵 목표 이행을 추진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개혁 동향
1. 독립외부평가(IEE) 권고 및 실행계획
2009년 10월 유네스코 제35차 총회는 유네스코가 직면한 외부의 도전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독립외부평가(Independent External Evaluation, IEE) 임무와 필요예산을 승인하였다. 전문성과 다양한 지역대표성 등을 고려하여 구성된 IEE 팀은 2010년 9월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유네스코의 집중력 증대 △ 현장 접근성 강화 △ 유엔에 참여 강화 △ 거버넌스 강화 △ 동반자 전략 개발 이라는 5개의 전략방향을 유네스코에 권고하였다.
2011년 유네스코 제36차 총회는 IEE 후 속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그 결과로서 사업예산문서(C/5)에는 기존에 비해 기대결과(expected results)의 수를 다소 축소하고, 4년 주기의 사업계획을 도입하기로 하였으며, 현장사무소 네트워크 개편을 추진하는 한편, 비정부기구와의 동반자관계에 관한 새로운 지침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매번 집행이사회 회기마다 사무국에서 IEE 이행현황을 보고할 의무가 있는데, 유네스코 사무국 보고서에 의하면 5개의 전략방향 별로 이행해야 할 후속 조치가 총 87개 사안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조치완료된 사안은 23개이며, 아직도 진행중인 사안은 64개에 이른다.
2. 계획의 주체와 책임성 제고 문제
유네스코 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회원국의 단합된 의지와 사무국의 추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유네스코 회원국의 의사를 반영하는 운영기구로 총회와 집행이사회가 있다. 총회는 모든 회원국의 대표로 구성되며, 2년에 한 번 정기회의를 개최하여 유네스코의 정책과 주요 노선을 결정하고, 4년 임기의 집행이사국과 사무총장을 임명한다. 집행이사회는 지역별 균형을 감안하여 58개국으로 구성되며, 유네스코 사업의 집행을 확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무국은 사무총장과 직원으로 구성되며, 사업을 집행하고 총회와 집행이사회의 결의 및 결정을 수행할 의무를 진다. 사무국 직원은 170여국 출신의 2000여 명에 이르며 700명 가량이 65개 지역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회원국의 이중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IEE에서 권고한 첫 번째 전략방향‘집중력 증대’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 사업의 축소를 통해 유네스코가 경쟁력이 있는 사업에 집중해서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개별 국가들은 개혁의 큰 방향에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대개는 특정 사업을 폐지하지 못하도록 사무총장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 작은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한 경우가 많이 관찰된다.
운영기구와 사무국 차원에서 효율성 제고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다. 인건비 대 사업비 예산 비율이 대략 7:3으로 단시일 내에 개선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사무국 직원의 업무 효율성과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한 인사 제도의 개편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한국의 역할
1. 의제 선점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다자외교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적절한 의제를 선점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여 그에 대한 주인의식을 확고히 해야 한다.
유네스코에서 한국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자연과학 분야이다. 정부간 해양학위원회는 유엔 내 유일한 해양과학 전담기구로 2011년부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변상경 박사가 의장직을 수임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인간과 생물권 사업 국제조정위원회 및 국제수문학사업 정부간 위원회의 의장직을 한국의 전문가들이 역임한 바 있다. 이러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단의 전문가적 역량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둘째로 교육분야에서 한국은 기술직업 교육훈련 부문에 있어서 특별한 이해를 갖고 있다. 직업교육이야말로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발 개도국의 경제발전에 훌륭한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한편, 한국은 2015년 세계교육회의를 유치하였다. 또한, 2012년 9월 교육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높이고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주도로‘교육우선구상(Education First Initiative, EFI)’이 출범하였다. 유네스코가 EFI 의 사무국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바, 최근 경제위기 등으로 지연되어 온 EFA 목표 달성을 위해 EFI의 역할이 기대된다.
셋째로 문화분야에서 한국이 비교우위를 갖는 부문은 무형문화유산보호제도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은 2003년 채택된 비교적 역사가 일천한 협약이지만,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무형문화재 및 인간문화재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협약의 발전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여지가 많다. 한편, 세계유산 분야에서는 관련 국제회의에 꾸준하게 전문가들이 참여하면서 역량을 키워 와, 한국대표단의 수준도 이제는 세계유산위원회를 주도하는 국가들에 근접하였다고 본다.
2. 중재자 및 조정 역할 강화
높아진 위상과 기대되는 역할을 감안하면, 유네스코에서 한국이 중재자 또는 조정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과시할 때가 되었다. 논란이 있는 이슈에 대한 기권 입장 또는 컨센서스 참여에서 벗어나 사안별 검토에 따른 입장 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네스코는 권능 분야인 교육, 과학, 문화 및 커뮤니케이션 관련 인권 침해와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 산하 위원회의 하나인 협약 및 권고 위원회는 유네스코가 채택한 협약 및 권고의 이행을 감시하는 임무와 함께 유네스코 권능 분야와 관련된 인권침해 청원을 심사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특히, 이 위원회의 두 번째 임무와 관련, 인권 선진국과 인권 침해국 간의 갈등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 대표단은 협약권고 위원회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표단 차원의 꾸준한 참여를 통해 역량을 축적하게 되면, 한국 대표단이 언젠가는 대립하는 두 그룹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 의사결정기구에의 주도적 참여
유네스코에는 6개의 선거그룹이 돌아가면서 총회 의장 및 집행이사회 의장을 수임하는 관행이 있다.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태평양그룹(ASPAC)은 2013년에 총회 의장직을, 2017년에 집행이사회 의장직을 맡을 차례가 된다. 12년마다 한번 돌아오는 기회인 셈이다. 한국 대표단이 그간 축적한 역량 및 경험을 바탕으로 집행이사회 의장국 수임을 적극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총회와 집행이사회 이외에도 의장직 진출을 추진해 볼 만한 정부간위원회들이 있다. 특히, 한국은 세계유산과 무형문화유산분야에서 상당한 전문성을 축적해 왔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목록에의 등재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구이다.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이 되면 2천 명 이상이 참가하는 세계유산위원회회의를 자국에 유치하게 되는 이점도 있다. 2009년까지 위원국으로 활동한 바 있는 한국은 2013-2017년 임기의 위원국 선거에 입후보하여 선출되면 임기 중에 세계유산위원회 의장직 수임 및 회의 유치를 동시에 추진해 볼 수 있다.
4. 국내 인프라 구축 및 강화
위에서 기술한 의제 선점, 중재자 및 조정 역할 강화 및 의사결정기구에의 주도적 참여를 적절히 지원하기 위해서는 국내적으로 적절한 총괄 및 지원 체제가 필요하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2010년 독립 상주대표부의 출범 덕분에 국내 인프라 구축이 어느 정도 완성된 듯하다. 외교부의 유네스코 담당부서(공공외교정책과)와 주유네스코대표부 간에는 정책부서와 집행기관의 관계를 넘어서는 더욱 유기적인 협의 체제구축이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위원회의 하나인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많은 국가의 유네스코 관계 인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 이유는 한위가 예산과 인력 면에서 독립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010년부터 한위사무처 직원 1명을 주 유네스코대표부에 파견 근무토록 함으로써 대표부와 한위 간 업무 협조가 향상되었고, 한국 대표단의 유네스코 회의 참가 수준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유네스코 관련 외교정책을 협의하고 관련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실무급의 상설협의체 운영을 제안한다. 현재는 집행이사회 및 총회 대비 의제 검토 및 우리 입장 정립 등을 위하여 관련 실무급 회의를 하여 왔지만, 향후에는 외교적인 관점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가운데 세부적인 사항들을 챙겨 나가는 체제로 발전해 나
가기를 바란다.
이 글은 ‘유네스코 정책연구’결과물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