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이 산업화 이전 시기에 비해 2도 이상 높아지지 않도록 하고 가급적 1.5도 아래로 묶어두도록 전 세계가 노력하기로 한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이 체결된 지도 7년이 넘었다. 하지만 체결 당시 ‘지구사의 전환점’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이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국제사회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특정 계층이나 특정 업계, 특정 국가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목표 달성이 요원하다는 전망을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1.5도와 2도 사이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보편적인 상식 수준이 되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파리협정이 지구의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약속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이라면 그것이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이상 높아지지 않도록, 가급적 1.5도 이하의 상승으로 제한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약속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협정의 초안 작성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 전문가들이 왜 그렇게 ‘1.5도’를 고집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왜 파리협정은 기온 상승 제한 목표치를 간결하게 섭씨 2도라고 못박지 않았을까? 왜 전문가들은 ‘1.5도 이하로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문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까? 1.5도는 되고, 2도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엔 차원의 기후변화 대응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2도 이하로 제한하고 1.5도 이하로 묶기 위해 노력’한다는 파리협정의 문구는 결코 ‘2도라도 괜찮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IPCC는 홈페이지에서 ‘왜 1.5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파리협정의 내용 리뷰를 맡았던 ‘구조화된 전문가 대화(SED)’의 견해를 인용하며 “기온이 1.5도만 오르더라도 지구상의 몇몇 지역과 취약한 생태계에는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평균기온 상승폭 2도 이내에서 가능한 다양한 온실가스 배출의 시나리오를 (당사국들이) 선호할 것”이라는 SED의 리뷰가 협정 문안에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1.5도까지의 온난화는 해가 없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고, 방어선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1.5도라는 방어선이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라는 사실은 IPCC가 2018년에 내놓은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에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이 2도일 때와 1.5도일 때의 결과를 분석한 이 보고서가 보여주는 우리의 미래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 두 온도 사이에서 북극권의 얼음이 완전히 녹는 해의 출현 빈도가 10년에 한 번일지 100년에 한 번일지가 결정된다. 해양 생태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 중 하나인 산호초가 완전히 멸종될지 30퍼센트 정도는 살아남을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극단적인 이상 고온에 노출되는 인구가 전 세계의 3분의 1일지 10분의 1일지가 결정된다.
1.5도, 타당하지 않은 미래?
이러한 차이를 알고 나면 단지 상대적으로 덜 어렵다는 이유로 1.5도 대신 2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난 7년간의 ‘골든타임’을 지지부진하게 흘려보낸 인류에게 1.5도라는 목표는 점점 ‘노력하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적에 가까운 희망사항’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리협정 목표 달성을 위한 적정 온실가스 배출량과 현 시점에서의 배출량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유엔개발계획의 『배출 격차 보고서 2022』(Emissions Gap Report 2022)에 따르면, 2021년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각국이 약속한 바를 이행하더라도 인류가 파리협정의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보고서는 현 배출 상황을 감안할 때 금세기 말까지 지구 기온 상승폭은 2.8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며, 앞으로 각국이 COP26에서 공표한 목표치를 온전히 달성하더라도 상승폭은 2.4도(조건부 달성)에서 2.6도(무조건 달성)까지만 개선될 뿐이다.
독일 함부르크대의 ‘기후, 기후변화, 사회(CLICCS)’ 전문가집단이 내놓은 『함부르크 기후 미래 전망(Hamburg Climate Future Outlook)』 보고서는 냉정하게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1.5도 이하로 묶어둘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타당하지 않다”(not plausible)고 이야기한다. ▲유엔 거버넌스 ▲국제적 기후변화 대응 ▲기후 관련 규제 ▲기후 관련 저항 및 사회 운동 ▲기후 관련 소송 ▲기업 대응 ▲탈화석연료 ▲소비 패턴 변화 ▲언론 ▲기후 관련 지식 생산의 10가지 사회적 동인이 높은 수준의 탈탄소화 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한 이 보고서는 1.5도 이하의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에는 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느리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의 공동 저자인 아니타 엥겔스(Anita Engels) 함부르크대 환경사회학 교수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과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면서, “그저 문제가 생기면 대응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맨 앞에 선 청년들
기후변화로 전 인류가 위기에 처했고, 이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어떻게 인류 전체가 단합된 모습으로 신속하고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가이다. 그러한 변화의 선봉에 선 이들은 역시 적극적인 기후행동의 필요성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그린 제너레이션’, 즉 청년과 미래세대다.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젊은 활동가들은 이미 5년 전부터 기후위기 앞에서 미적거리고 있는 국제 지도자들을 향해 호통을 치기 시작했고, 유치원과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많은 청년들은 학창시절 때부터 다양한 캠페인과 활동을 펼치며 일상에서 기후활동을 실천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이들의 행동은 구호로만 그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계획을 실천하고, 동참을 호소하며, 때론 저항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내 몸의 건강을 위해 조깅을 하면서 지구의 건강을 위해 쓰레기도 줍는 ‘플로깅’(plogging; ‘줍는다’는 뜻의 스웨덴어 ‘plocka upp’과 조깅의 합성어)을 하고, 단순히 다이어트나 건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육류 제품 사이클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우려하며 비건(vegan) 지향의 식단을 꾸리고, 그러면서도 이 모든 활동이 그저 ‘자기소개서에 쓸 내용’ 때문이 아니냐는 기성세대의 오해에 맞서 “우리의 암울한 미래를 함께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 일갈한다.
청년세대는 더는 나의 작은 실천만으로 세상이 저절로 변하리라 기대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영국의 비영리 기후연구단체인 ‘카본브리프’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오늘날 태어나고 있는 미래세대에게 허용된 탄소배출량은 195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배출했던 양의 8분의 1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 청년들은 이와 같은 탄소 부채를 자신들만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불공정을 순순히 감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국의 청년기후단체 ‘청년 기후 긴급행동’의 이은호 활동가는 2021년 온라인 매체 『라이프인』과의 인터뷰에서 “(분리수거활동, 콘센트 뽑기, 텀블러 사용 등) 개인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방식은 드러나는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면서 “개인의 실천보다 정부와 기업이 움직였을 때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의 기후 활동이 청년들만의 운동으로 끝나게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같은 단체의 오지혁 대표 역시 자신들의 활동은 그저 청년 간 네트워크 형성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세대 간의 전쟁이 아닌, 우리 모두의 전쟁
미래세대가 요청하는 ‘급격한 변화’는 기성세대로부터 종종 ‘현실을 잘 모르는 젊은 혈기’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 오해가 쌓여 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층위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파멸적인 경고음을 내는 기상이변, 그리고 기후위기에 별다른 책임이 없으면서도 가장 먼저 기후변화의 응징을 받고 있는 소규모 도서국가들의 비명을 마주하면서, 점점 다양한 세대가 전면적인 변화에 대한 청년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간 ‘기후 무관심층’이라는 오해를 받았지만 이제는 손자·손녀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기후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그레이 그린(grey green; 환경 운동을 하는 노인층)’도 그중 하나다.
오늘날의 노인층이 과거 환경에 대한 인식 없이 무분별한 경제성장을 구가했던 시기의 주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러한 사실만으로 이들이 모두 기후변화에 무관심하다거나 청년 세대와 각을 세우고 있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기후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최근의 여러 조사들은 그러한 선입견을 깨는 것에서부터 모든 세대가 ‘함께’ 기후변화의 대응책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2021년 영국 런던 킹스 칼리지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의 영국인들은 세대와 무관하게 열 명 중 일곱 명이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손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꿀 용의가 있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에서 ‘그럴 용의가 있다’고 응답한 베이비부머 세대(50대 후반-70대 후반)의 비율은 오히려 전체 평균보다 높은 74%였다. 같은 해 유엔개발계획(UNDP)이 영국 옥스퍼드대와 함께 50개국에서 수행한 사상 최대규모의 기후변화 관련 설문조사(‘People’s Climate Vote’)에서도 60대 이상의 58%가 기후변화가 긴급한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이는 18-35세 연령층의 65%에 비해서는 낮은 수치이지만, 그간 기후변화 관련 문제를 ‘세대 간의 전쟁’(generational war)이라고까지 일컬었던 여러 언론의 관습적 표현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수치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대해 바비 더피(Bobby Duffy) 런던 킹스칼리지 정책연구소장은 “기후변화에 대한 세대 간 대립을 과장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고 파괴적”이라면서 “더 푸른 미래를 원한다면, 세대 간에 보이지 않는 골을 만드는 대신 모든 세대가 함께 행동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대에 맞는 교육 — 변화를 위한 씨앗
사실 앞서 언급한 UNDP의 조사에서 세대 또는 지역과 무관하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바로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 및 참여와 교육 간의 상관관계였다.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고(부탄 대졸 학력의 82%, 프랑스 대졸 학력의 82%), 나이나 성별과 관계 없이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교육 수준을 가진 사람이 환경 관련 정책을 지지하는 비율(58%)이 전체 평균(42%)에 비해 높았다. 이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후변화를 멈춰 세우는 것 역시 인류의 다양한 유산과 과학적 성취로부터 뻗어나온 지식과 연대의 정신을 대화와 교육을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심음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라는 유네스코의 믿음과도 부합하는 결과다. 과감한 정치적 합의가 의미 있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젊은 세대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사회 변혁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곧바로 치환되지 않는 상황에서, 교육은 너무 늦지 않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기초교육과정에서부터 환경보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보며 자라난 청년 세대는 오늘날 기후행동의 가장 강력한 주체가 되었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뒤늦게나마 이를 배운 기성세대는 조용하지만 점점 더 적극적인 기후행동의 참여자이자 후원자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교육체계가 사회 전체의 도저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내기까지 기다리기에는 1.5도를 넘어 2도를 향해 가고 있는 기후재앙의 시계가 너무 빠르다. 유네스코가 환경교육을 포함한 이 시대에 걸맞은 교육의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 학생과 교사의 목소리를 듣고, 지속가능발전교육(ESD)의 확산을 모색하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적극적인 논의를 요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파국을 향해 가는 시계를 되돌릴 수 있을까.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분석한 여러 보고서들은 이제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강력한 전염력을 갖고 있는지 잘 안다. 하나로 연결된 인간의 마음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순식간에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변화의 흐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안다. 2011년 하버드대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는 20세기 이후 일어난 수백 건의 사회적 저항운동을 조사해 ‘거대한 정치적 변화는 인구의 약 3.5%가 저항에 참여할 때 일어난다’는 내용의 ‘3.5% 법칙’을 발표한 바 있다.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과반’이 아니라 단지 3.5퍼센트. ‘2도’와 ‘1.5도’라는 작지만 거대한 벽 앞에서 의기소침했던 우리에게 이 3.5퍼센트라는 비율은 사그라지는 희망을 다시 부여잡기에 충분한 숫자가 아닐까. 대화와 연대를 통해 기후위기에 저항하고, 새 길을 모색하는 교육을 통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에 저항하는 씨앗을 싹틔우기에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