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본부에 들르려면 파리 지하철 6호선 캉브론(Cambronne) 역에서 내리게 된다. 역 이름은 프랑스 대혁명 시절 피에르 캉브론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파리의 도로, 지명, 건물, 기념비, 박물관 등에는 늘 기억될 만한 이름과 사건들이 함께 하고 있으며, 그러한 기억의 장치들은 지난 일을 현재형으로 변환함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과거 속의 개인적·사회적·국가적 정신을 끊임없이 재생하고 환기시키고 있다. 흥미롭게도, 프랑스 최고의 학술 기관으로 알려진 프랑스 학사원은 산하 5개 학회가 2013~14 시즌에 공동으로 다룰 특별 주제로 ‘과거는 지난일인가?’(Le Pass´e est-il pass´e?)를 선정한 바 있다.
유네스코가 과거를 기억하는 1차적인 방법은 역사서를 기술하는 일이다.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의 노력을 직조하여 유네스코가 출간한 <아프리카 통사>(전 8권), <인류의 역사>(전 7권), <중앙아시아 문명사>(전 6권) 등은 유엔 기구 중 유네스코만이 할 수 있는 지적 성과이자 교육, 과학, 문화에 대한 기념비적 기여였다. 특히, 유럽의 식민지적 관점이 아닌 아프리카에 의한 최초의 아프리카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는 <아프리카 통사>는 1964년에 시작하여 35년에 걸쳐 완간되었으며, 이후 15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현재 제9권의 출간을 논의하고 있는 진행형의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다.
역사서 외에도 유엔기구들이 공유하는 기념해와 기념일도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상징적 메시지이자 역사적 다이제스트가 된다. 예컨대, 2005년 유엔 총회에서 선포된 ‘홀로코스트 추념일’(1월 27일)은 유네스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념일 행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데, 이는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하여 특정 기억을 적절한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성공 사례이다. 물론, 유네스코가 과거를 기억하는 가장 성공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는 국제적 제도를 통해서이다.
세계유산협약(1972)과 무형유산협약(2003)은 과거가 현재에 전달하는 정체성과 창의성의 기억을 다룬다. 아울러, 세계기록유산으로 알려진 ‘세계의 기억’ (Memory of the World) 프로그램은 현재 약 100개국 301점의 기록물이 국제목록에 등재되어 역사와 기억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데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은 전쟁과 외교에 대한 기억, 노예제에 대한 기억, 정치적 폭력과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 식민지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 대한 기억 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어 국제협약에 기초한 세계유산, 무형유산 등 여타 유산 제도도 다룰 수 없는 인류의 양심과 승리, 인권의 가치 신장을 통한 민주주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굳이 역사학과 기억담론을 들추지 않더라도 역사 인식과 화해, 문화간 이해, 문명간 대화에 근거한 인류 공동의 기억을 확립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은 작업이다. 기억의 최대공약수를 이끌어내려는 합리적 노력이 배가될수록 우리는 더이상 ‘과거가 지난 일이 아니다’라는 역설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박물관 증언모음’에는 50년 동안 꾸준히 수집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1억 3800만 페이지의 문서를 포함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기억이 역사를 말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집요한 노력이 필요한지를 절실히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강상규 주 유네스코 대한민국 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