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미의 완성, 창덕궁
창덕궁에는 잔잔한 강물이 흐르듯 배치되어 있는 건물을 따라 느긋하게 걷기 좋은 길이 뻗어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거진 숲길 안 후원이 그윽한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벗 삼아 한국의 미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궁궐 산책길이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문을 연 첫 궁이라면, 창덕궁은 ‘한국적 미’를 완성한 궁이다. 산자락을 따라 골짜기에 안기듯 배치한 건물과 너울거리는 기와, 낮은 담장, 후원의 연못 등 궁궐을 이루는 낱낱의 요소가 주변환경과 수려한 조화를 이룬다. 프랑스 건축가 장미셸 빌모트는 “한국적 미를 잊지 않으려면 일 년에 적어도 두 번은 창덕궁을 찾아야 한다”라는 말로 창덕궁을 예찬했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지은 이궁(離宮)이다. 풍수지리 원리와 조선왕조가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유교 사상을 투영한 궁궐로 비정형적 조형미를 은은하게 뿜어낸다. 남쪽에는 궁궐 건물을, 북쪽 넓은 구릉에는 후원을 조성했는데, 평지에 일직선으로 건물을 배치한 경복궁과는 달리 불규칙한 산세와 지형을 살리기 위해 건물을 자유롭게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궁궐 산책의 시작은 정문인 돈화문에서 시작된다. 독특하게도 돈화문은 정전과 일직선 방향이 아닌, 궁궐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왕과 대신이 출입하던 돈화문 양쪽으로는 각각 궐내각사(闕內各司; 규장각, 억석루, 선원전, 예문관 등 궁궐 내 주요 관서)의 관원들이 오가던 금호문과 외척 및 궁인이 드나들던 단봉문이 있다. 금호문을 지나면 1997년 창덕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나오고, 이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금천교, 직진하면 궐내각사에 이른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하천을 건너는 다리’라는 뜻의 금천교는 바깥세상과 궁을 구분 짓는 경계다. 흐르는 세월에 금천은 마르고 없지만 금천교는 1411년 태종 대에 지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문안도 하고 정사를 아뢰며 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등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인정전의 변화를 보면 조선왕조의 역사와 시대상을 알 수 있다. 1405년 태종 때 만들었고 연산군 때 지붕을 청기와로 바꿨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광해군 때 다시 제 모습을 갖추었다. 1803년에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1804년 재건됐다. 지금의 인정전은 바닥에 마루가 깔리고 유리창에 황금색 커튼이 달려 있는 등 순종 황제가 승하하기 전 1920년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왕의 정원인 후원은 한국 전통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소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이 조성돼 있다.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등 자연과 어우러지는 연못을 만들고,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자그마한 정자를 세워 정원을 아름답게 완성했다. 우거진 숲길을 걷다 보면 시야가 탁 트이며 부용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부용지와 그 옆의 정자인 부용정, 그리고 연못 너머로 보이는 주합루의 산수화 같은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가만히 보면 부용지는 사각형 연못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 전통사상을 반영해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인공 섬이 네모난 연못 위에 둥실 떠 있다.
사색하며 걷기 좋은 길은 부용지를 지나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연경당까지 이어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골짜기의 연못과 정자들을 찾아보자. 걷는 걸음마다 후원의 그윽한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창덕궁 여행자 노트
동궐도 | 가로 5.84m, 세로 2.73m의 거대한 화폭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이다. 창덕궁에 방문하기 전에 참고하기 좋은 그림으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율곡로와 궁궐담장길 |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율곡로 위에 초록의 산책로와 궁궐담장길이 생겨났다. 궁궐담장길은 창덕궁 돈화문에서 원남동 사거리까지 담장을 따라 뻗은 340m의 걷기 좋은 길이다.
창덕궁 달빛 기행 | 매년 봄과 가을, 달빛 아래 청사초롱으로 길을 밝힌 창덕궁과 후원을 거닐며 고궁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는 문화행사가 열린다.
글, 사진 우지경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