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근원이자, 생명의 모든 특징을 담고 있는 유전자를 자유롭게 자르고 붙일 방법을 손에 넣었다. 값싸고 쉽게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되면서, 한편에서는 그것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완벽한 ‘인간 그 이상의 인간’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세상을 앞두고,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가치를 지켜낼 한 줄의 선을 긋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의 작동 개념도. 박테리아의 면역 체계의 일부로 작동하던 Cas9 이라는 효소를 활용해, 편집이 필요한 유전자를 잘라내고 새로운 유전자로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다. 기존의 유전자 편집 기술은 Cas9이 하는 역할을 고분자물질인 단백질에 맡겨야 했는데, 적절한 단백질을 인공으로 만들어내는 데 대단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Cas9은 RNA의 몇 가지 염기서열만 바꾸면 연구자가 원하는 최적의 구조를 만들고 이를 대량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호킹 박사가 예견한 디스토피아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인간(superhuman)이 나머지 인간을 절멸시킬 것이다.”
지난달 중순, 스티븐 호킹 박사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은 유고집 『어려운 질문에 대한 간략한 답변』(Brief Answer to the Big Question)이 발간되면서 소개된 호킹 박사의 충격적인 예언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인공지능과 유전공학 등 과학계의 최신 동향과 관련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호킹 박사는 급속히 발전하는 유전공학이 인간의 욕망과 결합해 만들어낼 디스토피아를 예견했다. 금세기 안에 인간의 지능과 본능까지 조작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한 호킹 박사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조작을 금지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더라도 기억력과 건강, 장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부자들이 자신들의 후세가 더 나은 기억력과 건강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유전자 조작을 선택하리라 예측했다. 이렇게 탄생한 슈퍼인간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면 인류는 결국 사라지거나 의미 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완벽한 지능과 신체를 가진 부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대로 태어난 사람들은 주변부로 소외되는 세상. 이 어두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공상과학영화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석학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준다. 눈과 머리카락 색깔, 키, 나아가 성격과 지능까지 자유롭게 ‘쇼핑’해서 내가 원하는 아이를 만든다는 상상이, 더는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영역에서 그 가능성을 급격히 키워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쉽고 저렴해진 ‘가위질’
상상 같은 이야기를 이처럼 매우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수 있는 현실로 만든 새 유전자 편집 기술은 지난 2012년에 탄생했다. ‘크리스퍼(CRISPR-Cas9) 유전자 가위’ 라 불리는 이 기술은 앞세대의 기술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쉽게 유전자의 특정 부분을 잘라내거나 새로운 유전자로 바꾸게 해 준다. 저명한 과학저널 『네이처』와 『사이언스』는 등장하자마자 전 세계 연구소의 ‘핫아이템’으로 떠오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2013년의 주요 과학 성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기술의 기초메커니즘을 오래 전부터 연구해 온 김진수 전(前)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지난 2013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간편하고 값싼’ 이 기술의 장점이 의학뿐 아니라 농축산업 등 수많은 영역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예측했다. 김 교수는 “결국 양의 차이가 질의차이를 가져올 것”이라며, 전 세계 연구실에서 한 번에 수만 개 유전자를 동시에 제어해 연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앞으로 유전자 편집의 범위와 분야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게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1세대 유전자 가위를 만들 수 있었던 연구실이 전 세계에 대여섯 곳, 2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을 보유한 연구소가 수십 곳에 불과했을 정도로 기존의 유전자 편집 기술은 어렵고 비싼 것이었던 반면, 이번 3세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최초의 논문이 보고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전 세계 1000여 개 이상의 연구실에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새 기술이 만들 신세계
하지만 불을 인간에게 쥐여준 프로메테우스가 그랬듯, 그리고 20세기 미국에서 핵분열 연구에 참여해 결과적으로 핵무기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과학자들이 그랬듯, 기존에 생각할 수도 없었던 획기적인 기술은 거의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신기술이 가진 막대한 파급력이 언제나 ‘좋은 쪽’에서만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의 권능에 비견될 만한, 유전자를 편집해 전에 없던 생명체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라면, 그 기술이 무분별하게 사용될 경우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수의 전문가는 유전자 편집 기술이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데 동의하면서도, 이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인다.
과학자들은 먼저, 최신 유전자 편집 기술이 정확도 면에서 기존 기술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여전히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을 경계한다. 아직 유전자 가위는 ‘가위질’이 필요한 유전자의 범위를 완벽하게 특정하고 그 부위만을 오차 없이 잘라내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잘라낸 자리에 새로 들어갈 유전자가 매번 완벽히 들어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유전자를 잘라내고 이어 붙이는 전 과정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벌어져 변이를 일으키는 일종의 ‘오발 사고’(off-target)도 일어날 수 있다. 유전자 가위가 엉뚱한 곳에서 변이를 일으켰을 때 그것이 다른 건강한 유전자에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과학자들은 유전자 편집 기술의 정확도와 안정성을 지금보다 더 높이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적·과학적 문제는 유전자 편집 기술이 제기하는 윤리적·도덕적 문제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유전자 편집 기술이 가진 엄청난 가능성이 열어젖힐 판도라의 상자가 인간 존재와 자연 질서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특정 질병 치료를 위해 주로 체세포를 대상으로 유전자 편집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연구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익을 좇는 자금이 투입되면서 연구진이 치료(treatment)가 아닌 향상(enhancement)을 목적으로 한 생식계열세포(정자, 난자 등의 생식세포 및 배아)조작에 나설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식계열세포의 유전자를 편집하면 해당 개체의 조작된 특징이 몸 전체와 그 자손에게까지 전달된다. 이는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되돌릴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뜻인 동시에, 자본의 힘으로 향상된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가진 인간이 대대손손 그렇지 못한 인간을 모든 면에서 압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호킹 박사가 언급한 ‘슈퍼인간’이 가리키는 지점이다. 이렇게 인간의 유전자를 불치병, 유전병 등의 치료를 위한 의학적 목적이 아니라 더 큰 키, 더 좋은 기억력, 더 튼튼한 신체를 가지려는 사회적 욕망을 위해 조작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인간의 조건’에 대한 합의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완벽한 몸과 지능을 가진 ‘맞춤 아기’(designer baby)의 등장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전제 또한 더는 쓸모가 없어질 수도 있다.
철학과 윤리 통해 그어야 할 선
이러한 이유로 현재 유전자 편집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과학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법적, 도덕적 측면에서 종합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유네스코도 산하 국제생명윤리위원회(International Bioethics Committee, IBC)와 정부간생명윤리위원회(Intergovernmental Bioethics Commit tee, IGBC),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World Commission on the Ethics of Scientific Knowledge and Technology, COMEST)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의제 설정과 조사를 수행하고 필요한 정책을 꾸준히 제안하고 있다.
각계에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 가장 중요하고 또 논쟁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문제는 결국 유전자 연구에 어떤 방식으로, 어느 지점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그 선에 대한 논의는 이미 초기 유전공학 연구가 태동하던 1980년대부터 진행돼 왔다. 2015년에는 미국의 생명과학자 4인이 『네이처』에 인간의 생식계열세포를 대상으로 한 게놈 편집 연구를 자발적으로 중단하자는 제안을 담은 글을 싣기도 했다. 이들 과학자는 글에서 “먼저 인간 생식 세포의 유전자 변형과 관련한 미래 연구가 어떻게, 어떤 환경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를 평가하는 방안을 구축하기 위해 전문가와 학계뿐 아니라 대중도 참여하는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9월 21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유전자 편집: 왜 윤리가 중요한가?’(Genome Editing: Why Ethics Matter?)라는 주제로 열린 라운드테이블도 유전자 편집을 다루는 연구에 필요한 윤리적 관점과 가이드라인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회의에 참석한 프랑스 국립보건의학연구소(INSERM) 윤리위원회의 제니퍼 머천트(Jennifer Merchant) 박사는 “(유전자 관련 연구의) 체세포에 대한 적용과 생식계열세포에 대한 적용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유전자 편집 연구가 제기하는 윤리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너필드 생명윤리위원회의 피터 밀스(Peter Mills) 박사 역시 “유전자 기술을 향상이 아닌 치료 옵션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생식계열세포에 대한 개입은 재생산, 즉 부모됨(parenthood)과 연결되므로, 반드시 윤리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지판 세우기
다양한 차원에서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전자 편집 연구 분야에 그어질 ‘선’에 대해 모든 관련자들이 동의하는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애초에 그 선을 그어야 할 정확한 위치란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그어진다고 하더라도 구속력 있게 지켜질 수 있을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안틴 룬쇼프(Jeantine E. Lunshof)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메디컬센터 조교수는 지난해 12월 『워싱턴포스트』에 쓴 칼럼에서 “(유전자 연구의 한계를 규정하는) 그 어떤 제약도 바닷가 백사장에 그어놓은 선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라는 파도 앞에 무력하게 쓸려나가 버릴 것”이라며, ‘궁극적 해답’을 찾으려는 윤리적 논의의 속도가 과학 발전 속도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룬쇼프 교수는 그러면서도 “철학과 윤리라는 잣대를 업계 최일선의 연구실로 가져오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윤리적인 관점에서 유전자 연구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럴싸한 문구를 고민하는 대신 연구 최전선에서 끊임없이 과학자들과 토론하고 논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룬쇼프 교수의 이 말은 과학자와 윤리학자, 각계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호기심으로 유전 공학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위험한 도로를 앞에 두고 ‘일시 정지’ 표지판을 세우는 일을 그저 관계 당국이 해 줄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 없듯, 우리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막중한 사안에 대해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결국 과학자의 손에서 ‘슈퍼인간’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 새롭고 완벽한 존재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우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국장
참고자료
유네스코 정부간생명윤리위원회 정부대표단『제25차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 및 정부간생명윤리위원회(IGBC) 공동회의, 제10차 COMEST 회의 참석 결과보고서』
theGuardian.com “Essays Reveal Stephen Hawking Predicted Race of ‘Superhumans’”
scienceon.hani.co.kr “‘3세대 유전자 가위’ 주목, 새로운 게놈편집 기법으로 떠올라”
washingtonpost.com “Gene Editing Is Now Outpacing Eth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