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사업본부장
한국의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국내의 유네스코 활동에 참여했던 여러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한국사회의 발전과정에 유네스코가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 유네스코 활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한국에서의 유네스코 활동 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향후 유네스코 활동에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1980년대 『과학과 사회』 한국어판 발간을 이끈 이승환 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사업본부장을 만나 보았다.
유네스코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기반 조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이 유네스코에 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서 유네스코를 통한 지원은 전후 교육·과학·문화 역량의 복구와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유네스코의 교과서 제작 지원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유네스코가 지원한 사업은 대부분 과학기술 분야였으며 이러한 지원은 1960년대에 집중되어 이루어졌습니다. 유네스코는 세미나, 워크숍 개최 및 연구비와 장비 제공 등을 지원했고, 이는 한국이 과학 전시회, 원자력, 기본 정보 인프라 등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한국은 해양과학 사업에도 본격 참여했는데요.
유네스코 과학기술사업 중에서 해양과학 사업은 사업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한국이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대표적인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한국의 정부간해양학위원회(IOC) 참여를 위해 한국해양과학위원회(KOC, 현 한국해양학위원회)를 설립하고 오랜 기간 동안 사무국을 맡아오는 등 유네스코 해양과학사업 참여에 역할을 해왔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쿠로시오 해류 합동조사’ 등 국제해양조사 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과정에서 국제협력 역량 뿐 아니라 해양과학의 국내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맥락이 이후 설립된 한국해양학회로 이어져 그 활동이 지금까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부터 환경문제와 인간과 생물권 사업(MAB)을 추진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이 경제개발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시기인 1972년 9월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환경문제연구협의회’를 개최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환경문제는 국내에서 제한되고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환경문제연구협의회는 유엔과 유네스코라는 국제기구의 틀을 활용하여 그 논의를 보다 개방적으로 만들고 다양한 정보와 동향을 국내에 소개했습니다.
‘생물권’(Biosphere)이란 용어를 국제사회에 처음 알린 것도 유네스코입니다. 환경분야에서 유네스코의 선도적인 역할은 이후에도 계속 발전했고, 1970년 1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환경분야의 정부간 사업인 ‘인간과 생물권 사업’(Man and the Biosphere Programme, MAB)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MAB는 일방적으로 환경을 보전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보전과 더불어 과학에 근거하는 합리적 이용을 함께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이 함께 협력하는 접근방식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도 선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문제 접근에 국제적 시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내 환경 생태 연구와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81년에는 생물권보전지역(Biosphere Reserve) 후보지 사전조사를 실시하여 1982년 12월에 설악산이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 제겐 큰 영광입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1980년 MAB한국위원회를 설립하고 2010년 이를 국립공원공단으로 이전하기까지 30년 동안 사무국을 맡아 왔을뿐만 아니라, 여전히 유네스코 MAB 관련 국제협력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북아 생물권보전지역 네트워크(EABRN)의 설립과 운영도 주도했습니다. 일본, 중국, 몽골, 러시아와 함께 북한도 EABRN의 일원이기에, 이 네트워크를 통해 남북간 교류와 협력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차원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당시 중국 장백산(백두산)으로 출장을 가서 북한의 김성근 박사를 만난 것도 제겐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우리나라의 첫 생물권보전지역과 관련한 기억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당시 생물권보전지역 신청지 후보는 한라산, 설악산, 광릉숲, 지리산 등 네 군데였습니다. 신청에 대한 자문을 얻기 위해 영국의 던컨 푸어(Duncan Poor) 교수를 초청해 현장 조사를 함께 했습니다. 푸어 교수는 한국에 오기 전 백두산도 방문한 바 있습니다. 푸어 교수가 찍어 온 백두산 사진을 받아, 당시 우리 위원회 홍보담당직원이었던 이윤희 과장이 서울신문에 전달하여, 생생하고 귀한 백두산 사진이 특종 기사로 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국내 첫 생물권보전지역인 설악산이 1982년에 지정되고 2002년에 제주도가 두번째로 지정될 때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생물권보전지역이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담은 생물권보전지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보니 지자체 참여나 관심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변하면서 MAB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보전과 발전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주제인 만큼, 좀 더 홍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은 국제협력에서도 본격적인 역할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1978년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입사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맡은 일이 동남아 과학 네트워크 사업입니다. 1976년 동남아 지역 기술교육 혁신회의를 필두로, 1977년 동남아 천연물화학 워크숍 등 매년 1~2차례 천연물화학과 미생물학 분야의 동남아 지역 연수과정과 워크숍 등을 주최했습니다. 당시 유네스코 자카르타사무소의 관장 하에 지역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안정적으로 협력을 추진할 수 있었고, 유네스코에서 중점적으로 아시아지역의 생물자원 정보 수집에 관심이 있어 재원 조달도 풍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네트워크의 구심점으로서 자원은 많지만 연구 및 기술 능력이 부족한 인도네시아나 태국의 관계자들을 초청해 분석 및 훈련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습니다. 서울대 천연물화학연구소, 한국과학원(KAIS) 등 국내의 역량 있는 연구기관이 참여했고, KAIS에서는 미생물의 이용에 관해 소장학자들에게 훈련과정을 제공하고 해당 사업 수혜자들이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1980년대부터 과학계에서는 과학의 사회적 역할, 타 학문과의 협력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유네스코의 다양한 과학분야 사업 중 ‘과학기술과 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TS) 사업은 유네스코 정체성에 가장 부합하는 사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STS사업은 과학에 대한 맹신보다는 다학문적, 학제적, 종합적, 통합적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도 1981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협동 세미나’를 개최하여 과학기술과 사회 간의 영향과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간 협력의 필요성, 그리고 바람직한 협력 방안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 세미나에 송상용, 김영식, 박성래 교수 등이 참여했고, 박승재 교수는 국내 최초로 ‘대학생의 과학에 대한 인식 및 태도 조사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1984년에는 유네스코가 1950년부터 간행해 온 계간지 『Impact of Science on Society』의 한국어판을 『과학과 사회』라는 제호로 발간했습니다. 당시 6개 유엔 공식 언어 외의 언어로는 유일하게 한국어판으로 발간된 이 책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유네스코는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연관되어 나타나는 윤리적 문제를 성찰하고 그 대처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보윤리사업과 생명윤리사업을 통해 과학기술과 관련된 윤리문제를 다루었으며, 1997년에는 「인간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1998년에 국내 최초로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에 관한 합의회의’를 시도했고, 1999년에는 ‘생명복제기술’을 주제로 시민합의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로 향하는 새로운 모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과학기술 영역에서 유네스코가 한국에 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한마디로 한국에 유네스코는 세계로 향한 중요한 창이었습니다. 한국전쟁과 그 후 이어진 분단체제라는 특수한 여건하에서 유네스코는 한국에 국제적이고 균형된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도 유네스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후에도 유네스코는 한국 과학계에 영향을 주는 여러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 왔습니다. 경제개발에 매진하던 시기에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고,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한 과학인가?’,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고민하게 된 데도 유네스코의 역할이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과학 발전을 통해 세계평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유네스코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끝으로 유네스코와의 지난 70년과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유네스코는 항상 사회적 의제를 이끌어 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의제를 따라가면서 점차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얘기한 STS를 비롯해 평생교육, 기능문해 등은 모두 유네스코가 시작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탈퇴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현재 유네스코의 역량은 회원국들에게 전문성을 제공하고 선도해왔던 과거에 비해 위축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고유의 가치는 유효하고, 여러 분야를 융통성 있게 다룰 수 있다는 유네스코만의 강점도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네스코가 선도한 의제들, 유네스코가 만든 개념을 우리에게 맞게 잘 활용하는 것이 앞으로 더 중요하고, ‘많이 하는 것’보다는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터뷰 진행 김은영 과학청년팀장
기사 작성 최연수 과학청년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