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마다 국민 성원이 혼 불어넣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한위)가 둥지를 틀고 있는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은 50여 년의 역사가 깃든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건립 당시에는 국내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현대식 건물로서 서울의 랜드마크라 불리기도 했다. 한위는 자체 회관 건물을 지니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성장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 평 한 평이 금싸라기 땅이라는 명동의 한복판에 어떻게 유네스코회관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그 뒤안길에는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우여곡절과 함께 국민의 뜨거운 성원이 자리해 있다. |
한위는 1959년 4월 11일 서울 명동 지금의 회관 자리(명동 2가 82번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원래 계획한 건축 기간은 3년. 하지만 정작 회관 건물의 준공식이 거행된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인 1967년 2월 17일이었다. 회관 공사가 이토록 지연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저간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시계 바늘을 1950년대로 되돌려 보자.
6·25 전쟁으로 국토의 상당 부분이 폐허가 된 한국은 세계에서 대표적인 원조 수혜국이었다. 휴전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한 최극빈 국가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에 유엔은 총회 결의를 거쳐 ‘국제연합한국재건단’, 일명 운크라(UNKRA)를 설립한다. 전쟁으로 붕괴된 한국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재건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였다. 운크라와 함께 한국의 교육 재건에 앞장선 국제기구가 바로 교육 과학 문화 활동을 통해 인류 평화를 추구하는 유네스코(UNESCO)였다. 당시 유네스코가 운크라와 함께 국내에 교과서 인쇄공장을 세우고 출간을 지원함으로써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그 시절, 흙바닥 노천교실에서 유네스코 교과서로 공부하며 꿈을 키운 어린이 중 하나였다.
한국은 1950년 6월 14일 전 세계에서 55번째로 유네스코에 가입한 정식 회원국가였다. 하지만 불과 11일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유네스코 활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국가위원회의 설립이 미뤄지게 된다. 국민의 여망 속에서 마침내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탄생한 것은 1954년 1월 30일, 전쟁의 포성이 그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이 가입한 국제기구는 유네스코뿐이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우리 국민이 세계로 통하는 창이자, 교육 과학 문화 교류의 산실로 떠올랐다. 하지만 한위에 쏠리는 기대와 위상과는 달리 내부 사정은 열악하기만 했다. 빈한한 재정으로 인해 변변한 자체 사무실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당시만 해도 한위에 대한 정부의 보조는 연간 400만~50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한위 직원들은 빈약한 재정을 열의와 의욕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자체 회관을 갖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처럼 작은 불씨가 일어났다. 1957년 신한산업주식회사 대표이던 신영순 씨가 명동 땅 372평에 대한 대지사용권을 무상으로 한위에 기증하면서 회관 건립을 위한 유네스코후원회가 설립된 것. 신씨의 기증을 계기로 설립된 후원회에는 유네스코 취지에 공감하는 문화계 및 실업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유네스코국가위원회 회관 건립에 정부 아니라 민간이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한위의 역할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여망이 컸다는 것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각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한위는 1959년 4월 유네스코회관 기공식을 가졌다. 애초 구상한 회관 건물의 규모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전 9층 총건평 2700평 규모의 회관을 3년 만에 건축한다는 방안이 제시됐다. 언론에 향후 건립될 유네스코회관의 모형도가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계약 변경 등으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착공한 지 28개월 만인 1962년 7월에야 대들보를 올릴 수 있었다.
건축가 배기형 씨가 설계하고 풍전산업이 시공을 맡은 회관 건물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연건평 3800평에 지하 2층 지상 13층 규모로 그 시절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회관 전면을 신기술인 알루미늄 커튼윌 공법으로 꾸미고, 엘리베이터와 냉난방 설비를 갖춘 최첨단 건물이기도 했다. 다양한 국제회합을 유치할 수 있도록 3~5층에는 4개 국어 동시통역 시설을 갖춘 대강당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언론에서 건립 중인 유네스코회관을 두고 ‘서울의 마천루’ ‘지성의 궁전’ 등으로 부른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듬해 연말로 예정됐던 회관 준공식은 차일피일 늦어지기 시작했다. 후원회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공사가 제자리 걸음을 했기 때문이다. 13층까지 철근과 콘크리트 뼈대만 갖춘 상태에서 한동안 내외장 공사가 중단돼 ‘명동의 도깨비 건물’이란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후원회의 빈약한 재정에 내부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공사 중단 사태는 의외로 장기화된다.
무엇보다도 회관 건립에 가장 커다란 난관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명동 회관 터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원래 이 땅은 일제강점기 때 중국인 부호 담정택 씨의 소유지였다. 그러나 담 씨 일가족이 1937년 중국 본토로 떠난 뒤 명동 땅을 ‘성업사’에서 위탁관리해오다가 광복 이후에는 ‘부재자 재산’으로 경성부동산주식회사-한일은행이 관리해오고 있었다. 유네스코 회관 건립은 한일은행을 통해 이 땅의 임대권을 얻은 신한산업의 신영순 씨가 1957년 8월 그 권리를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무상으로 양도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간 행방을 알 수 없던 담 씨가 회관 건립 공사 기간 중인 1963년 연말 국내 재산관리인인 정가현 씨를 통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 씨는 당시 홍콩에 거주하던 담 씨의 전권위임장과 함께 홍콩주재 한국영사 및 마카오 주재 중국외교부의 증명서를 들고 와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명동 땅의 부재자 재산관리인으로 돼 있는 한일은행을 재산관리인에서 해임하고 자신을 재산관리인으로 선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듬해 담 씨와 정 씨가 소송에서 이김으로써 명동 땅에 대한 한일은행의 관리권은 상실됐다. 결과적으로 신 씨를 통해 한일은행과 한위가 맺은 임대계약 역시 공중에 뜰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회관 건립을 정상화하라는 목소리였다. 결국 정부가 교통정리에 나서면서 후원회가 해체되고 관-민이 참여하는 회관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건립추진위원회는 담 씨 측과 중재에 나서는 한편 한일은행으로부터 새로운 융자를 받아 공사를 재개했다. 마침내 1967년 2월 17일 유네스코회관 준공식이 거행되면서 한위의 명동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한위 입장에서는 회관이 문을 열었으되 ‘춘내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건물 소유권은 한위에게 있었지만 건물 운영 및 관리권은 시공비를 융자한 한일은행 측이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애초 계획과는 달리 한위는 유네스코회관에서조차 셋방살이를 해야 했다. 입주보증금을 내고 건물 7층에서 130만 원의 월세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위와 은행 간의 관리권 문제에 대해 애초 정부는 한일은행 측의 손을 들어주려 했다. 그러나 국민여론이 들끓고 언론이 지원사격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결국 한위는 1974년부터 회관 관리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명동시대를 열 수 있게 됐다. 현재 유네스코회관 앞길은 ‘유네스코길’로 명명돼 있다. 회관 건립과 운영의 고비마다 성원과 응원을 보내준 국민을 생각하면 ‘국민의 길’이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