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타임머신 / 그땐 이런 일도] 한위 60년 뒤안길 들여다보기 I
올해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한위)가 설립된 지 60돌을 맞는 해이다.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국민적 여망을 안고 탄생한 유네스코한위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교육·과학·문화 활동을 펼치며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해왔다. |
대한민국 국민치고 석굴암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8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석굴암은 세계에서 유래 없는 인조 석굴로서 통일신라시대의 경이적인 건축문화가 담긴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의 용문 석굴이나 운강 석굴 등도 유명하지만, 이들 석굴은 자연동굴이나 돌을 뚫고 파서 만든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석굴암은 돌을 잇고 쌓아 굴로 만들고 여기에 본존불을 비롯해 환상적인 조각물을 배치하거나 새긴 석조 예술품이다.
석굴암은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오래전 국내 문화재전문가들과 유네스코한위의 남다른 노력이 없었다면 석굴암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후대에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반세기 전 석굴암의 훼손 문제로 문화재 관계자와 국민들이 애를 태운 적이 있었다. 1200년의 장구한 세월을 짊어져온 ‘불후의 명작’ 석굴암이 누수 및 풍화작용으로 인해 점차 훼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굴암 지키기’가 최대의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국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누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해 구체적인 보수 방안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유네스코한위가 도움을 요청한 곳은 유네스코 파리 본부였다. 애초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일본의 문화재 전문가를 파견해 석굴암을 보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갈등으로 치닫던 한일 외교관계로 인해 이 계획이 무산되고, 대신 이탈리아 로마에 자리한 유네스코 문화재보존센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문화재보존센터의 명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로서는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1961년 7월 중순 세계적인 문화재 보수 전문가이자 문화재보존센터 소장인 헤롤드 J. 플렌더라이스 박사가 한국을 방문한다. 30여 년간 영국국립박물관에 몸 담았던 플렌더라이스 박사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각국의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기여해온 학자였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국내외 전문가들과 함께 현지답사에 나선 박사는 기초조사를 마친 뒤 ‘개토 작업’을 제안했다. 석굴암을 뒤덮은 흙을 파헤치지 않고는 정확한 누수 원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석굴암을 건축할 때 신라인들은 원형으로 돌을 쌓아 돔을 만든 뒤 그 위에 자연석을 올리고 흙으로 덮었다. 자연적으로 통풍이 이뤄지도록 한 획기적인 공법이었다. 또한 석조물에 이끼가 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돔 바닥에는 샘물을 팠다. 샘물로 석실 밑의 온도를 낮추어 습기나 이슬이 석조물 대신 바닥에 맺히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석굴암에 깃든 신라인의 놀라운 지혜는 일제강점기 때 사장되고 만다. 1913년 일본인 토목기사가 대대적으로 석굴암을 보수한 적이 있었다. 이때 기초조사도 없이 돔 위에 시멘트와 콜타르를 바르고, 샘을 메워버려 자연적인 습기 조절 기능이 상실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는 석굴암 측면의 석축을 왜식으로 쌓는 등 석굴암의 예술적 가치를 크게 손상시켰다. 플렌더라이스 박사가 조사하던 당시 석굴암 샘물은 흙 등 이물질이 쌓여 석실 바닥보다 수위가 높아진 상태였고, 배수구마저 모래로 막혀 있었다. 자연히 침수현상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사는 샘의 수위를 낮추고 배수구를 멀리 뽑아냄으로써 우선 침수를 막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누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과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방한 이후 플렌더라이스 박사는 석굴암 등 국내 문화재의 답사 보고서 및 건의안을 유네스코 파리 본부에 제출했다. 이듬해 유네스코한위는 문화재 보존을 위한 재정 및 기술 원조를 파리 본부에 긴급 요청한다. 그 후 3년여의 보수·복원공사를 거쳐 1964년 석굴암은 세상에 다시 위용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직도 ‘손길’ 필요한 석굴암 1960년대의 석굴암 보수는 유네스코의 지원과 국내 전문가들의 노력이 하나로 모아진 큰 공사였다. 하지만 석실에 습기가 차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도 수차례에 걸쳐 석굴암 보수공사가 이뤄졌지만, 안타깝게도 석굴암 내부의 풍화 현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얼마 전에는 석굴암에서 일부 균열이 발견되어 보존관리에 비상등이 켜진 상태이다. 1961년 방한 당시 플렌더라이스 박사는 석굴암의 예술성을 극찬하는 한편 “앞으로 오십년만 더 이대로 방치해 두었더라면 석굴암이 완전히 원형을 잃어버릴 뻔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했다. 그때로부터 34년이 흐른 후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우리의 찬란한 문화를 지구촌에 대변해주고 있다. 문화유산은 한 번 훼손되면 원형을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자랑하고 누리는 것 못지 않게 지키기 위한 노력도 절실한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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