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로 그대 마음 전하는 게 바로 음악”
나이를 잊은 열강이었다. 청중은 ‘그’에게 몰입하고, ‘그’는 청중을 이끄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았다. 레슨 도중 잠깐 잠깐 그가 켜는 바이올린은 때로 연인에게 들려주는 속삭임 같았고, 때론 마음을 깨우는 나팔소리 같았다. 현역 최고령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금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거장)로 꼽히는 이브리 기틀리스(93). 음악, 그 이상의 것을 전해준 그의 마스터 클래스를 지상중계한다. |
지난 5월 22일 오후 2시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11층 유네스코홀. 박수갈채를 받으며 고동색 모자를 쓴 은발의 원로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이브리 기틀리스(Ivry Gitlis), 80여년을 바이올린과 함께하며 수많은 명연주와 음반을 남겨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세계적인 음악가.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이지만, 이날 그는 ‘선생님’으로 강단에 섰다. 이 자리가 바로 대한민국의 젊은 음악도들을 위해 마련된 마스터 클래스(masterclass)였기 때문이다.
마스터 클래스란 유명한 전문가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 이브리 기틀리스의 마스터 클래스는 50여 명의 청소년 음악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두 차례의 공개 레슨과 질의응답 방식으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첫 번째 레슨. 선화예술고등학교 박한나 양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나 양이 연주하는 동안 이브리 기틀리스는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거나 유심히 연주 모습을 지켜봤다. 연주가 끝난 뒤 ‘마스터’의 질문이 이어졌다.
“무엇을 연주하려 했습니까? 자신의 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틀리스는 한나 양에게 주제 멜로디 중 한 소절을 다시 연주하도록 한 뒤, 이번에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목소리로 멜로디를 노래하도록 주문했다. 그리곤 다시 아까 노래한 것처럼 연주를 해보라고 권했다.
“전체적으로 연주가 좋았는데, 굳이 하나를 짚자면…”이란 전제로 그가 지적한 내용은 “연주할 때 연주자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 “청중에게 곡을 전달하겠다고 크게 (연주)할 필요는 없어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인생을 담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감을 갖고 자기감정에 충실하세요.”
그가 다시 한 번 한나 양에게 바이올린 대신 목소리로 멜로디를 부르게 하더니 이런 말을 건넨다.
“눈을 감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본인의 노래를 느껴보세요. 안 해본 걸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한나 양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한 뒤 곁에서 이브리 기틀리스가 마치 멜로디 기능을 지닌 인간 메트로놈처럼 “따따~ 따따따~” 하며 박자와 음율, 소리의 크기를 맞춰준다. 알고 보니, 이런 교수 방법에는 연유가 있었다. 러시아인 스승이 어린 시절 그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 어느새 그와 한나 양이 함께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레슨 덕분일까. 처음 연주하던 때보다 한나 양의 연주가 서정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한나 양은 벌써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바이올린 자체를 고민할 게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것은 영혼의 바다와 같습니다. 잔잔한 파도도 있고, 심연의 깊은 곳도 있지요. 세익스피어는 ‘음악은 사랑의 음식’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삶을 연주한다고 생각하세요.”
잠시 휴식 뒤 이어진 두 번째 레슨 시간. 숙명여자대학교 박지영 양이 단상에 올라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치간느(Tzigane)를 연주했다. 치간느는 프랑스어로 ‘집시’라는 뜻. 이브리 기틀리스가 연주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인다. 연주가 끝난 후 그가 지영 양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번 레슨에서 이브리 기틀리스가 강조한 것은 곡에 맞는 색채와 톤이었다. 청중과 이야기를 나누듯 연주하라는 가르침은 첫 번째 레슨 때와 흡사했다. 이브리 기틀리스가 곡 중 한 대목을 지적하며 “왜 그 부분에서 크게 시작하지요?”라고 질문을 던지더니 돌연 두 가지 스타일로 “사랑해”를 외친다. 하나는 연인에게 건네듯 조곤조곤한 “아이 러브 유”, 다른 하나는 두 얼굴의 헐크가 외치는 듯한 크고 강한 목소리의 “알~라~뷰~”.“연주는 훌륭합니다만,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100%보다 약간 덜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어요.”
곡의 흐름에 따라 음의 크기와 템포를 달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쉼표의 의미도 강조했다.
“침묵, 고요함이 때때로 음악 그 이상일 때가 있어요, 베토벤의 운명에서 보듯. 음악이란 소리와 음표로만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여백의 미처럼, 쉼표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스스로 노래 부르며 연습해보세요. 자기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기틀리스는 지영 양이 연주한 곡의 한 소절을 직접 연주했다. 가느다란 선율을 통해 마치 무언가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는 곡 중에 한 옥타브를 건너뛰는 소절을 언급하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를 보세요! (작곡가가) 왜 이렇게 썼을까 생각해 보세요. 상상하세요. 바하의 곡 같은 경우엔 철저하게 지켜야 하지만, 라벨의 이 곡은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는 것이 중요해요. 상상해봐요. 극장에서 아이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고. 그런 마음으로 연주해 보세요.”
이브리 기틀리스가 강조한 것은 “음표, 그 이상을 연주하는 게 바로 음악”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게 바로 진짜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오픈시키고, 여러분께 들려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떠올려 보세요. 일상 속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음악입니다. 일상에선 불가능한 게 음악에서는 가능합니다.”
시침이 어느새 예정된 클래스 종료시간을 가리켰다. 2시간을 훌쩍 넘는 열강에 지쳤을 법도 한데, 그는 “하고픈 이야기가 아직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301세 바이올린 VS 93세 연주자 이브리 기틀리스가 사용하는 바이올린은 171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이다. 재질과 이니셜, 보존상태 등에 따라 수십억~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 중의 명품 악기이다. 얼마 전 파리 경매에서 1700년대 초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1대가 무려 4500만 달러(약 461억 원)에 매물로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마에스트로 이브리 기틀리스에게 이 특별한 악기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브리 기틀리스가 마스터클래스에서 남긴 이야기를 통해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자. “연주자에겐 자신과 바이올린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이 지닌 바이올린에겐 당신의 연주가 바로 존재가치입니다. 그리고 바이올린에게 연주자는 일종의 승객이기도 합니다. 제가 나이가 좀 많지만 이 바이올린보다 많지는 않지요? 내가 지닌 이 바이올린은 301년 된 것인데, 희망컨대 이 바이올린이 훗날 저를 훌륭한 친구였다고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