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학 체계와 그 윤리적 함의에 대한 보고서 발간
올해 초,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는 보고서 하나를 펴냈다. 보고서 제목은 ‘전통의학 체계와 그 윤리적 함의.’(Traditional Medicine Systems and their Ethical Implications) 바이오뱅크, 맞춤 의료, 나노기술, 신경과학 등 첨단 생명공학의 발전과 그 대응이 IBC의 주요 논의 주제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IBC의 기본 사명을 고려하면 IBC의 전통 의학 보고서 발간은 다소 의외다.
IBC는 1993년 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의 발전과 그 응용에 대한 사회적·윤리적 성찰을 목적으로 설립된 후 「생명윤리와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 등 생명윤리 분야의 굵직굵직한 국제규범 제정의 산파 역할을 했다. 특히 IBC는 지금까지 주로 생명공학이나 의료과학기술의 새로운 발전에 대응하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따라서 전통 의술사가 행하는 전통의료 행위는, 그 바탕이 되는 세계관이나 치료 수단 등만 놓고 보면, 생명윤리 분야의 국제적인 전문가들이 주시할 필요가 없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하루가 다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21세기에 ‘흘러간’ 전통의학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반문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BC는 전통의학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렇다면 보고서 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에 앞서 IBC가 전통의학과 근대의학을 각각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세계보건기구(WHO)의 전통의학에 대한 정의를 인용해 보자. IBC도 WHO의 정의를 대부분 수용하는 듯한데, WHO에 따르면, 전통의학이란 “서로 다른 문화 각각의 토착적인 이론, 신념, 경험 등을 바탕으로 건강 유지와 신체적·정신적 질병의 예방·진단·개선·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지식, 기능, 실천행위 등의 총합”을 말한다. 그렇다면 근대의학이란? IBC는 전통의학에 맞대응하는 개념은 명확하고 선험적으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으며 특정 사회에만 해당되지 않는 개념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정통의학, 제도권의학, 서양의학, 과학적 의학, 근대의학 등 다른 명칭들이 후보에 올랐고, 이 가운데 근대의학으로 결정됐다. 의학과 관련된 과학기술의 발전이 근대에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그런데 IBC가 선택한 근대라는 명칭에는 어떤 가치판단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게 IBC 위원들의 입장이었다.
IBC가 전통의학을 관심사로 다뤘다는 것은 꽤나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문화다양성을 증진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전통의학에 기반한 치료행위가 일상적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다. 이는 근대의학과 세계관이나 원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를 과학적이지 않다, 근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하기에는 이미 여러 지역 사람들에 충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의학의 영향력은 전통의학이 가진 장점 몇 가지만 열거하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일부 지역에서 전통의학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의료수단이다. 개도국 가운데에는 전통의술사가 근대의학의 의사보다 훨씬 더 많은 곳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200명당 전통의술사 1명인데 비해 근대의사는 5만명당 1명이다. 전통의학은 또한 값싸게 이용할 수 있다. 가나와 케냐에서 말라리아 치료를 받으려면 1년 의료비와 맞먹는 비용이 든다. 하지만 환자 자신이 갖고 있는 약재를 활용하면 보다 값싸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문화적 친연성, 특정 질병에 대한 효과성, 생물다양성의 보호, 전체적이고 인간중심적 세계관 등의 여러 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여러 나라에서 전통의학은 정신질환이나 심리적 문제의 치료에 이용된다. 특히 전통 중국의학과 인도의학은 류머티즘, 신경이상, 신진대상 장애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따라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의학의 하나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제적인 생명윤리 논의에 전통의학이라는 주제를 포함하는 것은 그와 같은 현실을 바탕으로 문화적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토착적인 의료 이론이나 경험을 인정함으로써 「생명윤리와 인권 보편선언」에서 강조하고 있는 “문화다양성과 다원주의”(제14조)와 “전통지식에 대한 존중”(제17조)을 이행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생명윤리와 인권 보편선언」 제14조는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기존 근대의학체계에 편입되지 않은 일부 전통의학이 안정성과 효험, 질적 수준을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야 의학의 한 갈래로 인정받을 수 있고, 인류가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의학적 치료 수단의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IBC의 전통의학 보고서 발간은 이처럼 문화다양성의 증진과 전통의학의 제도화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흐름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IBC의 전통의학 논의는 문화다양성, 생물다양성, 토착민권리 등의 보호·증진을 주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유네스코의 노력이 집약된 논의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이 논의에는 유네스코의 자연과학과 문화섹터 전문가가 참석해 생물다양성과 전통지식을 중심으로 각 섹터에 해당하는 주제와 전통의학과의 관련성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IBC 회의에 전통의학 종사자가 직접 참석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유네스코 섹터별 협업 또는 학제적 접근의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윤리의 논의 범위를 한층 더 넓히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월 열린 유네스코 정부간생명윤리위원회(IGBC)는 이 보고서에 담긴 내용들을 승인하면서 회원국들이 그에 부합하는 몇 가지 조치들을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먼저, 근대의학과 전통의학의 생산적인 대화를 강조하면서 전통의료를 그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할 것을 권고했다.
이와 함께 전통의술을 보유한 사람들이 체계적이고 적절한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천연 자원을 이용하려는 연구자들이나 다국적 회사들은 주민들의 사전동의를 얻고 결과와 사용의 이익을 공유해야 하며, 근대의학과 전통의학을 연구하는 국제기구, 비정부기구, 각종 연구기관들이 서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요컨대, IBC의 전통의학 논의는 1) 문화다양성 차원에서 전통의학을 인정하되 2) 전통의학을 서양의학처럼 국가 의료서비스 체계로 통합해 그 질적 수준, 효과성, 안정성을 국가가 관리할 수 있도록 하고, 또는 인권 등 생명윤리 원칙이 전통의학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고서의 기저에는 문화다양성의 인정과 전통의학의 기존 의료서비스 내 통합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인류의 이로움을 위해서 전통의학과 근대의학이 양립해야 한다는 신념이 흐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 전통의학의 이정표, 동의보감
유네스코는 제36차 총회(2011년)에서 동의보감을 한국 전통의학의 이정표이자 동양의학의 고전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고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되는 올해를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지정했다. ‘유네스코 기념의 해’는 유네스코가 2004년부터 2년마다 유네스코와 관련된 인물 또는 기념일이 있는 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리고 기리기 위해 지정해 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9월 6일-10월 20일 경남 산청군 동의보감촌 일원에서 ‘미래의 더 큰 가치, 전통의약’을 주제로 보건복지부, 경상남도, 산청군 주최로 열리고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등이 동의보감의 글로벌 브랜드 육성 및 한의약의 세계화 기반 조성을 위해 마련하는 제1회 동의보감 국제컨퍼런스 등 다채로운 전시, 공연, 체험 다양한 행사들이 엑스포 기간 동안 선보인다.
『동의보감』은 16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동아시아 의학 관련 서적 100여권을 집대성한 의학 백과사전으로서, 한국적인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일반 민중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의학지식을 편집한 세계 최초의 공중 보건서라는 점이 인정돼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신종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과학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