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부위원장(외교부 제2차관)
지난 70년간 한국과 유네스코가 함께 걸어온 여정에서 외교부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대(對) 유네스코 공여 사업의 창구이자 주체로서 그 소임을 해 온 외교부의 소감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부위원장인 이태호 외교부 제2차관을 통해 들어 보았다.
최근 많이 들으셨겠지만, 먼저 코로나 관련 질문부터 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방역 당국을 비롯한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으로 이제 한국은 조심스럽게 코로나 이후의 일상에 대한 희망을 꿈꾸고 있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례에서 보았듯 위기를 마주했을 때 공포와 혐오의 확산을 막고 이해와 협력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코로나19는 국제사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전지구적 차원의 조율된 대응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모두 함께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자국중심주의와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다자협력의 정신이 필요한데 이러한 정신이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국제적 연대와 협력 촉진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네스코는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공동 대응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 교육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제교육연합(Global Education Coalition)을 결성하고 원격학습 체계 구축을 지원하는 등 학생들의 교육권 보장에 앞장서고 있으며, 과학정보 공유 및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큰 타격을 받은 문화·예술계 보호를 위해 ‘#ShareOurHeritage’, ‘#ShareCulture’, ‘#ResiliArt Movement’ 등 다양한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지난 5월 말 유네스코 내에 ‘연대와 포용을 위한 세계시민교육 우호그룹’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유엔과 세계보건기구에도 우호그룹을 결성했는데, 특히 유네스코 우호그룹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특정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범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상호 존중과 연대를 강조하는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인식 제고에 앞장서며 유네스코와 함께 국제사회의 위기극복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2006년 교과서 인쇄기기와 용지를 유네스코 본부를 통해 북한에 지원했듯,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교육적, 과학적, 문화적 다리를 놓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국제 정치와 외교적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현 상황에서 유네스코가 한반도 평화 정착 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금년은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이자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50년 6월 14일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의 55번째 회원국이 되는 기쁨을 누리지만, 불과 11일 만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아픔을 겪었지요. 남북이 지난 70년의 분단과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평화 정착을 이루기 위해서는 유네스코 헌장에서 언급된 대로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의 방벽’을 세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네스코는 한국과 북한이 모두 활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제기구입니다. 그래서 남북교류와 협력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재 유네스코는 북한에서 직업기술교육, 정보통신기술교육 등 교육 관련 사업을 전개하고 있고, 이외에도 세계유산과 생물권보전지역 관리를 위한 역량강화 사업을 실시하여 북한을 돕고 있습니다.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도 남북 화해를 적극 지원해 온 분입니다. 2018년 11월 ‘씨름’이 남북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공동등재된 것을 기억하시지요? 아줄레 사무총장은 유산이 분쟁 상황 속에서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분입니다. 당시 우리의 취지에 공감한 아줄레 사무총장은 평양에 특사를 파견하고, 예외적으로 서둘러 절차를 진행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작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께서 비무장지대(DMZ)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 것을 제안하면서, DMZ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북 공동등재 구상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아줄레 사무총장은 환영과 지지 의사를 수차례 표명했습니다. 작년 12월 제가 아줄레 사무총장과 면담했을 때도 유네스코의 적극적인 협력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죠. 우리 정부는 남북 화해와 평화 등 엄청난 가치가 담긴 DMZ를 세계유산으로 공동등재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유네스코와 계속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입니다. 오랜 분단으로 생겨난 남북간 간극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유네스코 가입 70년의 역사는 곧 분단 70년의 역사이기도 한데, 한반도 평화 정착의 숙제를 푸는 데 있어서 평화를 지향하는 유네스코와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유네스코 가입 이후 지난 70년간 한국은 유네스코 회원국 중 가장 뒤쳐진 수혜국에서 최상위권 공여국으로 발돋움해 왔습니다. 미국의 탈퇴 상황에서 유네스코의 재정난이 가중되면서 비정규 예산의 비중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의 대(對)유네스코 자발적 기여 업무 채널인 외교부가 유네스코와의 협력 사업을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12월 아줄레 사무총장과의 면담을 위해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6·25 전쟁 직후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가 인쇄되어 교육현장에서 사용되었는데요, 당시 초등교육을 받은 세대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12년에 이 교과서를 유네스코에 기증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부 건물에 전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초기 회원국 시절에 우리가 받은 지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물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전후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받던 한국은 반세기 만에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은 작년 기준으로 정규분담금 규모로는 193개 회원국 중 10위, 사업 기여 규모로는 2위인 유네스코의 주요 공여국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많은 유네스코 회원국들이 우리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받기를 희망하고, 유네스코 내 한국과의 협력에 대한 기대와 관심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대한 우리 사업은 한국이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과학, 문화 분야 등에서 두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특히 아프리카와 성평등 분야에 대한 기여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우선순위를 갖고 추진하는 분야입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말리, 탄자니아 등지에서 소녀와 젊은 여성들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협력 사업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적지 않은 한국의 기여가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유네스코 사업의 적재적소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유네스코에 지원하는 분야와 우선순위는 외교부와 국내 기여주체인 정부 부처·지자체·기관, 그리고 유네스코 간 협의를 통해 결정됩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는 우리 공여주체들의 전문 분야별 사업들이 유네스코의 조직 목표와 중기적 사업계획에 부합하도록 조율하고, 우리의 기여가 효율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전반적 사업 이행을 지원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외교부는 앞으로 유네스코와 우리 국내 기여 기관 간의 더욱 단단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로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외교사에서 유네스코 가입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한국과 유네스코의 지난 70년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한국의 유네스코 활동 방향에 대한 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유네스코와 한국의 인연은 특별합니다. 우리의 유네스코 가입은 1991년 한국의 유엔 가입보다 40년 앞서 이루어졌습니다. 즉, 우리가 유엔 회원국이 아닌 상태에서 약 40년 간 유네스코에서 활동해 온 것이지요. 국제교류와 협력이 절실할 때 유네스코는 한국에게 국제사회와 교류할 수 있는 소중한 통로가 되어준 것입니다. 지난 70년간 유네스코가 우리나라의 경제와 사회 발전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결과, 오늘날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수혜국의 대표적 성공 사례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단기간에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모하였고, 유네스코 활동에 건설적으로 참여하는 주요 회원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과거 유네스코의 집중적 지원을 받은 우리나라는 이제는 수혜국이 아닌 공여국의 입장에서 유네스코의 분야별 기여 방향을 모색해 나갈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193개 회원국 중 이러한 경험과 위치를 갖고 있는 국가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유네스코 내에서 균형 잡힌 활동을 펼치는 데 큰 강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이 기회를 빌려, 우리의 유네스코 활동은 국제적 기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네스코의 가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싶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국가위원회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 점에 대해 감사드리고, 앞으로 유네스코가 우리 국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국위원회가 계속 노력해줄 것을 당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