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오픈 사이언스 권고 초안 검토를 위한 정부간 특별위원회
지난 5월 6-11일에 열린 ‘유네스코 오픈 사이언스 권고 초안 검토를 위한 정부간 특별위원회’에서 샤밀라 나이르 베두엘(Shamila Nair-Bedouelle) 유네스코 자연과학 사무총장보는 눈시울을 붉히며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네스코의 역할과 가능성, 그리고 평화와 연대를 향한 노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오픈 사이언스 권고안의 합의 소식을 전합니다.
일반인들에게 아직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란 무엇일까요? 과학을 ‘개방’(openness)한다고 하면, 과연 누구에게 어디까지 개방하자는 것일까요? 유네스코에 따르면 오픈 사이언스란 “다양한 언어권의 과학지식을 누구든지 접근·활용할 수 있게 하고, 보다 나은 연구와 사회를 위하여 연구협력과 정보공유를 증대하며, 나아가 사회구성원에게도 과학지식의 생산과 확산 과정을 개방하는 활동과 운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과학적 연구와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공유하겠다는 뜻이며, 과학 발전의 혜택을 다함께 누리며 평등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오픈 사이언스가 주목받고 있을까요? 우선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오픈 사이언스를 실천하는 것이 보다 용이해졌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전 지구가 전례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오픈 사이언스를 통한 과학 공유와 협력이 더욱 필요한 때라는 공감대도 있었습니다. 이에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더 많은 나라들이 오픈 사이언스 논의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규범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유네스코가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글로벌 기준을 만들기 위해 나섰습니다.
지난 2019년에 열린 제40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회원국들은 오픈 사이언스에 대한 글로벌 기준을 마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회원국 의견 수렴과 지역별 자문회의 등을 거쳐 권고안을 만들었고, 이번 회의에서 전 세계 110여개국의 회원국 전문가 및 정부 대표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침내 최종 문안에 합의했습니다. 이 합의안은 올 가을에 열리는 제4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최종 채택될 예정입니다.
과학자와 법조인 등 전문가로 구성된 이번 회의에서는 학문적 자유와 오픈 라이선스 등의 문구 하나하나를 놓고 열띤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어떤 회원국에서 권고안을 조금이라도 소극적으로 바꾸는 용어를 도입하고자 발언을 하면, 여러 회원국들이 나서서 좀더 구속력이 있는 문구를 쓰자고 입을 모아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큰 쟁점 사항은 언뜻 상충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오픈 사이언스와 지적 재산권의 공존 문제였습니다.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이 부분은 기존 제도를 존중하는 선에서 상호보완적으로 두 제도가 공존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예민한 부분임에도 이분법적 접근을 탈피하려는 회원국들의 노력이 신선하고 혁신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옵서버로 참여한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역시 오픈 사이언스 권고안을 적극 환영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회의가 온라인으로 열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도 이 민감한 주제에 대해 성공적으로 합의를 도출해 낸 의장의 역할도 돋보였습니다. 의장을 맡은 세인트루시아 대사는 모두 발언을 통해 이번 회의에서 권고안이 합의되지 않으면 올 11월에 열릴 총회에서 권고안을 채택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다시 2년을 기다려야 한다며 회원국들이 유연성을 발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매일 당초 계획된 시간보다 두 배 가량의 시간을 할애해 회의를 진행한 끝에 예정보다 하루 일찍 권고문 합의안이 마련됐습니다. 의장은 “이번 회의는 유네스코가 보여준 다자주의 외교 성공 사례 중 가히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며 회원국들이 보여준 상호 존중과 유연한 자세를 극찬했습니다.
한국대표단으로 회의에 참석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신은정 단장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송사광 센터장도 이번 권고안 조율 과정에 한국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예년처럼 현장에서 함께 회의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대신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전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한국 시간으로 새벽까지 계속된 열띤 토론에 적극 참여해 주신 두 분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픈 사이언스 권고문이 채택되면 한국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유네스코 오픈 사이언스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신은정 단장은 “당장 한국에서도 오픈 액세스 출판 활성화, 연구데이터 공유, 오픈 사이언스 클라우드 추진 관련 정책과제에 모멘텀을 제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특히 이번 권고안 합의를 통해 전 세계 연구계에서 디지털화가 가속화될 것이라 전망한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회의에서 유네스코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최근 유네스코의 전략적 전환과 미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유네스코는 각 회원국이 의견을 모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는 이번 회의를 통해 ‘규범 설정자’(standard-setter)로서의 역할과 가치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권고안은 분명 희망찬 미래를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앞으로의 실천이 더욱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제부터는 각 지역과 국가별 상황에 맞는 정책과 세부계획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모니터링하는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선언에서 협약으로 발전하며 모니터링 체계를 마련한 선례를 생각할 때, 오픈 사이언스 권고문 역시 국제사회의 노력과 합의를 통해 더욱 체계적인 제도로 발전하리라 봅니다. 코로나19 이후 열릴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이번 오픈 사이언스 권고문이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한 발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임시연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