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시험 점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당장 시험을 없애자’라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시험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어떤 명암을 갖고 있을까. 아시아 각국의 ‘시험 문화’를 비교 분석한 유네스코 방콕사무소의 보고서를 한국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좋은 시험과 나쁜 시험
시험 제도 개편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사회 전 영역에 서는 수많은 의견과 불만이 쏟아져나온다. 시험이 그자체로 좋은지 좋지 않은지, 좋은 시험과 나쁜 시험을 가르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와 학자, 그리고 국민들이 한 가지 동의하는 부분은 있다. 시험이 학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시험 이라는 형태로 평가받는 교육의 목표가 그저 ‘좋은 학교 진학’이 아닌, ‘좋은 삶을 위한 바탕 다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모두가 원론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육의 당위적 목표에 대해서는 유네스코와 유엔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 4번인 ‘교육 2030 의제’는 모두를 위한 포용적이고 공평한 양질의 교육을 보장하고 평생 교육의 기회를 증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교육이 그저 아이들을 교실로 데리고 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갈수록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하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지혜란 단순한 시험 점수가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 창의력, 팀워크 같은 가치다.
하지만 ‘시험 권하는 사회’에서 시험 제도를 개편하는 것만으로 그러한 가치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유네스코 방콕사무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아시아·태평양지역 각국에서 시험이 갖는 의미를 분석한 보고서 <시험 문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배움의 사회문화적 영향에 관하여>(The Culture of Testing: Sociocultural Impacts on Learning in Asia and the Pacific)를 발표했다. 160여 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진은 방글라데시, 피지, 인도, 일본, 카자흐스탄, 한국, 필리핀, 통가, 베트남의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교육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설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존에 발간된 자료를 취합했다.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는 늘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정작 국내에서는 수많은 문제점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아시아 각국의 교육 현장에서 시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험은 교육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무엇이 시험 권하는 사회를 만드는가
시험은 전 세계 어느 교육과정에서나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흔한 평가 방식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방콕사무소가 아시아 국가에서 치러지는 시험에 특히 주목한 이유는, 이들 국가에서의 시험이 단순한 평가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이를 ‘시험 문화’(culture of testing)라 규정한다. 시험 문화 속에서 시험은, 특히 결과가 학생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시험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와 긴밀 하게 연결돼 있다. 시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그 시험이 갖는 특정한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뜻과 같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해당 사회 구성원들은 시험에 자발적으로, 혹은 ‘목숨 걸고’ 뛰어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능이나 몇몇 국가고시의 예에서 잘 알 수 있듯,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시험이 갖는 사회적 역할이란 다름 아닌 ‘사회적 계층 이동’과 ‘더 많은 경제적 기회’를 뜻한다. 계층 이동과 경제적 기회는 무한정 나눠 쓸 수 없는 자원이다. 보고서는 이들 국가에서 시험이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더 좋은 학교, 더 훌륭한 경력, 나아가 더 많은 삶의 기회를 보장하는 도구가 곧 시험 점수다. 따라서 인터뷰에 응한 모든 조사 대상 국가의 학생, 학부모, 교사가 “시험이 미래에 더 많은 기회와 연결돼 있다”고 답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보고서는 “한국에서 시험은 개인의 삶의 질과 성공을 결정짓는 전통적이고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기능해 왔다”고 분석한다. 한국에는 다른 국가들과 구별되는 ‘교육열’(education fever)이 있다고 말하며, 이 같은 교육열의 근원은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려는 욕망”이라 분석한다. 한국인 응답자들 역시 계층 이동 도구로서 교육의 역할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답했다. 흥미로운 점은 교사의 71퍼센트가 시험의 주목적이 ‘학생들의 학업 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것’이라 답한 반면, 학생의 62퍼센트와 학부모의 56퍼센트는 시험이 ‘다음 단계로 올라가거나 향후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라고 답했다는 사실이다. 시험의 ‘진정성’에 대해 교육 소비자와 공급자 간 인식의 차가 적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외에도 조사 대상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덧붙여 보고서는 ‘계층 이동’이라는 시험의 사회적 역할이 “학생들에게 강력한 내·외적 동기를 부여하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학생만이 아닌, 온 가족의 과업
보고서가 분석한 바와 같이 조사 대상 국가에서 시험이 학생들에게 약속하는 ‘미래의 경제적 보상’과 ‘사회 계층 이동’이라는 열매는, 학생들에게 동기와 함께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는 양날의 검이다. 보고서는 특히 학생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라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 며, 이 부분이 다양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번 조사 대상 아시아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자녀의 시험 성적에 대한 가족 단위의 관심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성공과 출세라는 욕망이 개인 단위의 경쟁으로 그치지 않고, 가족 구성원 모두의 ‘올인 프로젝트’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뜻이다.
물론 각국의 교육 당국은 시험의 목적이 신분 상승이나 경제력 확보의 수단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도입해 지식, 기술, 가치, 윤리 등 교육 본연의 의미가 시험을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수없이 변해 온 우리나라의 수능 및 대학 입시 제도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과는 별개로 대다수 학생들의 가족 구성원, 특히 부모들은 자녀의 시험이 곧 자녀의 ‘기회’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연히 가족 구성원들의 관심은 학생의 학업 과정보다는 시험 결과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보고서는 아시아 국가들에는 위와 같은 실리적 이유에 더해 ‘가문의 명예와 가족의 체면’이라는 아시아 문화권 특유의 가치도 덧붙는다고 분석한다. 학생들이 시험에 대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어진 이유다. ‘과거’라는 일종의 국가 고시에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가문 전체가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뤄내던 조선시대의 모습, 그리고 ‘사법 고시 OO회 합격자’라는 현수막이 마을 초입에 심심찮게 내걸리던 한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적어도 아시아권에서 시험은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임이 이번 보고서에서도 드러났다. 실제로 85퍼센트의 한국 학생들은 시험 성적과 학업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상당 부분 가족의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라 답했다. 또한 응답자의 70퍼센트가 시험에 대한 학생의 관점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부모라고 답했고, ‘자녀의 성공이 곧 부모의 성공이며, 부모 자신의 정체성을 아이에게 투영한다’는 내용도 함께 소개됐다.
시험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보고서는 조사 대상 국가에서 나타난 시험의 사회적 특징들이 학생과 부모, 교사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준다고 지적한다. 더 높은 점수, 더 좋은 자리,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한 경쟁하는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커다란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또한 교육 과정의 주요 관심이 ‘점수’로 집중됨으로써 학습의 목적 또한 점수로 단순화되는 결과를 초래하며, 시험이나 입학과 관련된 부정부패와도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학원 등 교육 과정 주변의 학습 관련 산업 역시 ‘교육=점수’라는 공식을 더 강화시킨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 조사 대상 국가 학생들은 학교 밖에서도 대단히 많은 시간을 시험 준비에 쏟고 있다.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나 두려움이 근절되지 않는 한, 온갖 사교육 방지 대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조사에 응한 학생들 중 65퍼센트는 자신의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을까봐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답했고, 보고서는 이러한 걱정이 학교폭력, 따돌림, 게임 중독 등과 함께 학생들이 안고 있는 주요 걱정거리 중 하나라고 말한다. 한 교사는 “만점을 받는 10퍼센트 학생 외의 모든 아이들이 불행해 한다”며, “심지어 그 10퍼센트의 만점 학생들도 행복하지는 않다”고 답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시험이 주는 이와 같은 부정적 효과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여러 나라가 ‘학생 중심의 종합 평가’를 도입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생 중심의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학생들이 시험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팀워크나 협력 같은 가치를 더 잘 습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도 교육의 완전한 해답을 제시해줄 수는 없다. 보고서는 학업의 모든 단계뿐 아니라 지역 사회, 국가 기관에 이르기까지 ‘시험 문화’가 깃들어 있는 상황에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도전이라고 말한다.
시험의 변화는 사회 전체 시스템의 변화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보고서가 교육 당국과 학교, 그리고 정부가 더 넓은 시야와 장기적 계획을 갖고 학생들에게 긍정적 교육 환경을 구축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유의 ‘문화’로서 존재해 온 시험을 없애려 하기보다는, 시험의 여러 부정적 측면을 해소시킬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