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최초의 유네스코 본부 국장’으로 국제기구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롤모델이 된 최수향 유네스코 평화·지속가능발전국 국장이 9월 5-6일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세계시민교육 국제회의’(3rd International Conference on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세계시민교육의 시작 단계부터 책임자로서 함께해 온 최수향 국장에게 세계시민교육에 관한 다양한 조언을 청해 들었다.
세계시민교육은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의 세부목표 중 하나인 동시에,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을 위해 전 인류가 뜻을 모으기 위한 밑바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에서 비전을 제시하는 것과 단기적 관점에서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모두 중요할 것 같습니다.
2012년을 전후하여 유엔 내에서 처음 세계시민교육 이야기가 나올 당시, 세계 곳곳은 계속되는 테러와 내전 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까지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제안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반기문 당시 유엔사무총장 이하 관계자들은 교육이 궁극적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특별히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국제사회에서 ‘교육’이라고 하면 개인이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을 갖고, 더 나아가서 국가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로 생각했지, 교육의 인류 평화에 대한 공헌을 구체적인 국제사회의 교육의 목적으로 표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 EFA) 사업 같은 경우 ‘어떻게 하면 모든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받도록 할 수 있을까’와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죠. 그런데 유엔과 유네스코는 2015년부터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준비하면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 것이고 그렇게 배운 것이 어디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을 하면서 이제는 교육이 개인이 잘 살고, 한 나라가 잘 사는 데 기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평화에 공헌해야 한다고, 즉 인류 평화가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착상에서 세계시민교육이 나오게 된 것이지요. 유네스코는 지난 6년간 세계시민교육의 개념을 정리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병행해 왔습니다. 그렇게 기반을 다지는 작업과 함께 세부적인 목표 및 평가 항목을 만들었고, 이제는 세계시민 교육이 각국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세계시민교육과 맥을 같이하는 지역적 개념을 찾고 있습니다.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이 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곳에서, 세계시민의 추상적인 개념을 지역적·문화적 특성에 맞게 구체화하려는 노력입니다. 사실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은 많은 국가의 문화와 전통에 이미 내재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홍익인간’ 역시 큰 틀에서 세계시민의식과 다르지 않은 개념입니다. 유네스코는 이처럼 전 세계의 문화와 역사 안에 이미 ‘세계시민’의 DNA가 내재해 있다고 보고, 앞으로는 이 부분을 드러내서 세계시민교육이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는 분쟁과 폭력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국가에서 ‘화해’(reconciliation)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도 준비하고자 합니다. 식민 지배와 착취를 겪은 국가들처럼, 상대방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에서의 세계시민교육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직시하고 이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다양성 존중, 인권의식 공유, 연대와 같은 가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과거를 정리하고, 과거를 딛고 일어서는 화해의 과정을 앞으로 세계시민교육의 중요한 의제로 삼고자 합니다.
세계시민교육이 한국의 교육 과정에 핵심 주제로 부상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교육과정 안에 녹여내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일선 교사들의 의견입니다. 세계시민교육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팁이랄까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지속가능발전교육’(ESD), ‘세계시민교육’(GCED)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지속가능발전교육이나 세계시민교육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과목이라기보다는, 기존 교육과정 내의 다양한 과목 안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 개념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세계시민교육을 단독 교과로 가르치는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일선 현장에서 세계시민교육의 내용을 고민할 때도 인권이나 환경, 다양성 존중 같은 세계시민교육의 여러 요소들을 기존 교육 체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태도와 신념체계와 행동에 관한 교육으로서 세계시민교육에는 다섯 가지 단계, 또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정확한 지식 전달’입니다. 교육 현장에서 왜곡되지 않은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과학적 사실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단계입니다. 정확한 지식 전달 이후의 단계는 ‘비판적 관점’(critical perspective)을 기르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에서 교육자는 설령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일지라도 가능한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고, 학생들이 그 다양한 관점들에 대해 토론하고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특정 사안을 자신만의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공감 능력을 키우는 단계입니다.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장에 가 보고 직접 느끼는 과정을 거치면 해당 사안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공감만 한다고 해서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로 그 사안이 내 삶과 연관성(relevance)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반드시 내 삶의 터전, 즉 지역 사회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특히 ESD같은 분야에서 더욱 절실한 부분이기도 하고, 아직까지 우리 교육이 미처 갖추지 못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지식과 경험과 스스로 느낀 바를 이슈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픔이 집단의 아픔으로 이슈화가 되면 사회혁신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로 좋은 세계시민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단계 중 적어도 공감 형성 과정, 그리고 지역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슈화하는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를 바꾸기 위해 행동하는 세계시민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세계시민교육이 우리 국민, 특히 한반도 평화 정착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저는 그 무엇보다 세계시민교육이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크다고 생각 했습니다. 만약 남북 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오랫동안 서로 관계 맺지 않고 살던 두 나라 국민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learning to live together)이야말로 세계시민교육의 핵심 아닌가요?
우리는 흔히 세계시민교육이라 하면 ‘국경을 뛰어 넘은 관계 맺음’을 생각하지만, 세계시민교육은 한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같이 살자는 것이 세계시민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계시민교육 하면 흔히 떠올리는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지구 한 바퀴 도는’ 이미지는 세계시민교육을 너무 좁게만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세계시민교육은 순진하고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분쟁이나 차별이 혼재하는 복잡한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임을 꼭 알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적대적 이었던 과거를 뒤로 하고 현재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한반도야말로 그러한 세계시민교육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유네스코헌장」전문에 “전쟁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 속”이라고 나와 있듯이, 평화의 구축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유네스코가 한반도 평화 정착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그간 유네스코가 세계시민교육을 비롯한 평화, 인권, 극단적 폭력주의 예방교육 등 교육 분야에서 쌓아온 노하우와 경험을 적절히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남북이 확실한 상호 신뢰의 토대를 쌓을 때까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다자간 시스템을 통해 유네스코가 평화 구축의 공간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도전과 과감한 시도를 거듭하며 지금의 자리에 오르신 국장님을 바라보며 국제기구에서 일할 꿈을 키워가는 젊은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과 더불어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후배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국제기구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회와 경험이 많기 때문에,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이 매력적인 직업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이 일이 갖고 있는 특별함 이면에 있는 어려움도 반드시 미리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꾸린 채로 세계 각국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사업 성과가 즉시 나타나는 일이 아니기에, 내 일의 보람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한편 분쟁 지역이나 난민 현장에 파견되는 경우 직업으로서의 위험 부담도 감수해야 합니다. 예전에 테러 활동이 심한 한 국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같이 일하던 다른 유엔기구의 동료가 폭탄 테러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목격했습니다. 현장에 파견되지 않고 각국 정부와 소통하면서 사무국에서 일하는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고충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무국은 회원국이 합의하는 큰 결정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조직인 만큼, 사무국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유네스코 사무국에서 일하는 경우, 200여 개에 달하는 회원국의 의사를 소상히 파악하고, 각국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능력도 갖춰야 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인턴십 등을 통해 이러한 부분을 미리 경험해 보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기를 권합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후배들에게 저는 이 조직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유네스코 내에서도 한국위원회는 조직으로서 탄탄한 모습을 보여 왔고, 지금도 여러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앞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따라 한국위원회가 주도적으로 할 일이 더욱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잘 알고, 모든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임해 주시길 당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