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시대, 과학과 역사와 교육에 관한 사색
추운 겨울이 가고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지만, 급변하는 과학기술은 해가 바뀌기 무섭게 인류에게 전혀 새로운 희망과 걱정과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인문사회·자연과학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인 박명규 교수가 ‘챗GPT’와 함께 시작하는 새학기가 학자이자 교육자인 본인에게 어떤 감상을 던져주고 있는지를 전해왔다.
‘문명으로 보는 21세기’. 광주과학기술원에서 내가 2년 전부터 가르치는 과목의 이름이다. 21세기를 문명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수업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근현대 변동을 연구해온 나는 과거의 유산이 현대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전망할 수 없으며, 역사는 ‘경로의존’과는 전혀 다른 ‘대전환’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서서히 진행되던 나의 이런 관심 전환이 더욱 뚜렷하게 된 것은 흥미롭게 읽은 두 권의 책 때문이었다. 한 권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였다. ‘내일의 역사(History of Tomorrow)’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가가 과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포괄하는 변동을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첨단과학기술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책은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기술의 변화 속도가 지수함수적이어서 21세기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기존의 방식과 지혜로 감당할 수 없을 질적 변화가 초래되리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이런 결정적 전환의 변곡점을 특이점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다가올 미래로의 변화가 얼마나 혁명적일지 힘을 주어 설명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생각의 변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였다. 모든 것이 단절되고 차단되던 시점에 나를 외부와 연결시켜 준 것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이었다. 음식도 주문하고 지인들과 안부와 정보도 교환하면서 내 생활이 얼마나 기술 인프라에 의존되어 있는지 절감했고, 앞으로의 일상은 더더욱 이 새로운 과학기술문명의 자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회 제도의 본질을 숙고하게 되었다. 문을 닫은 학교 앞에서 교육이란 무엇이며, 모이지 않고 가능한 배움의 방식은 없을지 자문해 보았다. 문을 닫은 교회를 보면서는 미래의 종교의례가 어찌될 것인지 관심이 갔다. 닫힌 공연장 너머로는 온라인을 통한 예술의 새로운 향유 방식이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의 불편함 속에서 미래를 다시 바라보는 각성의 계기였다.
2023년 봄, 서서히 학교는 과거 모습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진행된 변화의 영향은 크고 넓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디지털 소통에 입각한 상호작용 방식을 찾으려는 시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챗GPT’라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등장이 적지 않은 파장을 던지고 있다. 오픈AI(Open AI)사가 내놓은 이 프로그램은 불과 몇 달 만에 전 세계의 관심을 끌어들이면서 산업, 교육, 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이 우리 일상에 미칠 영향이 갑작스레 실감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이 쓴 보고서를 평가해야 하는 나로서도 이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두어 달 가량 이런 저런 방식으로 채팅을 해본 결론은 ‘아직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상당한 수준의 글쓰기 실력과 자료정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챗GPT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옳은 방식도 아니라는 판단에서, 나는 적극 활용하되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말 것,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의 차이를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했다. 실제 효과가 어떠할지는 두고 두고 살펴볼 숙제거리다.
계절의 순환은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흐름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 마당에는 매화가 피어 옛 선비들이 남긴 글귀들을 떠올리게 한다.올해는 3년 만에 100만 명이 모인다는 광양 매화축제 뉴스도 들린다. 디지털의 편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저 번잡한 현장을 찾아 나서는 까닭은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아날로그적이어서 직접 바라보고 접촉하는 현장감을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일 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한국의 서원과 사찰, 탈춤, 판소리 등도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공유하고 전승해온 아날로그적 자취에 기반한다. 과학기술문명의 놀라운 변화와 파급력이 ‘유산’이라 불리는 과거의 자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 주목해 볼 문명사적 주제 중 하나다. 이번 봄에는 꽃향기를 찾아 나도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인데, 챗GPT 의 파장이 내 수업과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반쯤은 흥미롭게, 그리고 반쯤은 우려하며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박명규 광주과학기술원 초빙석학교수,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