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업무 정체성을 가진 주재관의 일상
매년 5월마다 유럽 주요 박물관들이 참여하는 ‘유럽 박물관의 밤’ 행사에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본부’가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본부라는 게 어떤 본부를 말하는 것이냐고요? 당연히 본부는.. 본부는.. 흠흠, 그러게요. 주재관에게는 그 본부가 어떤 본부일까요..?!
주재관으로 근무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습니다. 다행히 이곳에서의 일상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습니다. 사실 저는 자타공인 길치이지만, 이제는 휴대폰 지도 앱의 도움 없이도 헤매지 않고 출근하고 집 주변 산책도 할 수 있게 돼서 스스로 무척 뿌듯해 하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집들은 왜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을까요? (저한테만 그런가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면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갑니다.
이런 일상에 비해 업무적으로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새로운 조직에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됐으니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지 못했던 소소한 난관도 있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바로 ‘본부’라는 명칭입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직원에게 본부란 곧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를 뜻합니다. 바로 지난호 주재관 서신 앞머리에도 저는 ‘본부의 소식을 전할 예정’이라고 썼죠. 유네스코한국위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유네스코 지역사무소와 카테고리 1·2센터 직원들도 ‘본부’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의 직원들에게 본부는 곧 한국의 외교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또한 전 세계의 대한민국 대사관 및 대표부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일 테지요. 주재국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에게 본국의 외교부가 본부인 건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직원으로서 대표부에 파견근무 중인 저에게 본부는 어디일까요? 민간인으로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소속을 유지한채 파견근무를 하는 제가 외교부를 본부라고 부르는 건 어색한데, 그렇다고 저 혼자서 본부라는 단어를 유네스코 본부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거예요.
처음에는 앞에 ‘유네스코’나 ‘외교부’를 붙이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습관의 힘은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유네스코 본부를 본부라고만 써서 작은 오해가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어느 쪽에도 본부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유네스코 사무국’ 혹은 ‘외교부’라고 구분해 부르면서 실수가 줄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금 저에게 본부란 유네스코 본부나 외교부가 아닌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두(혹은 세) 본부 이야기는 주재관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다중정체성의 한 단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주재관들도 고민하는 부분일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요. 때로는 약간의 긴장과 혼란이 수반되는 다중정체성이 한편으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문득 ‘본부’의 영어표현이 ‘headquarters’, 즉 끝에 무조건 s가 붙는 복수형 명사라는 사실이 떠오르네요. 입사 초기에 몇 번 s를 빼고 적으면 그때마다 영문교열자가 이를 고쳐 주어서 기억하게 된 철자입니다. 적어도 주재관으로 근무하는 기간에는 그냥 쿨하게 “본부는 원래 복수형이다”라고 받아들이고 지내려 합니다. (유네스코의 또 다른 상용 언어인 프랑스어에는 본부의 단수형인 ‘siège’가 있는 사실은 잠시 잊어 주세요.)
다만 여러분이 읽고 계신 『유네스코뉴스』에서 본부는 여전히 유네스코 본부인 만큼, 헷갈리지 않고 ‘본부’와 관련된 소식을 잘 챙겨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이런, 본부 이야기를 하느라 지난 5월 13일에 본부에서 열린 ‘유럽 박물관의 밤’ 행사 소식을 전할 지면이 남지가 않았네요. 다행히 매년 열리는 유럽 박물관의 밤 행사에 대해서는 저의 전임 주재관께서 작년 6월호 『유네스코뉴스』에 잘 소개해 주셨으니, 올해 행사는 사진으로만 감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보강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 주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