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백제역사유적지구
저물어 가는 부여의 노을은 백제의 고도(古都), 사비를 떠올리게 한다. 사비에서 도약을 꿈꾸었던 고대 왕국은 사라지고 없지만, 부여에는 백제인의 정신이 깃든 고유한 유산이 남아 있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700년간 존속했던 백제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며 고유한 건축 기술과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 왕국이다. 백제가 멸망한 지 1355년이 지난 2015년, 부여의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은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 석탑 등은 백제의 고유한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능산리 산등성이에 한 자락 남아있는 나성으로 향한다. 나성은 수도 사비(부여)를 보호하는 요새였다. 백제 성왕이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538년 전후에 부소산성에서부터 시작해 사비를 감싸도록 쌓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중 사비의 동쪽을 둘러싼 성벽 일부가 온전히 남아 있다. 나성의 바깥에 위치한 부여왕릉원(구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의 왕릉들이 있다. 부여왕릉원 맞은편에는 백제고분모형관이 있어 백제시대 고분의 변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93년에 백제고분모형관 옆 절터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석조사리감과 함께 출토되기도 했다.
부소산성에 올라 영일대에서 백화정까지 걸으며 굽이치는 백마강 물줄기를 바라본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함락당하자 삼천 명의 궁녀가 바위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해 낙화암이라 불렀고, 낙화정이라는 정자도 세웠다. 해발 100m 남짓 되는 부소산은 야트막한 산이지만 북쪽으로는 백마강이 있고 남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천연의 방어막을 구축하기 좋은 지형이다. 이곳에 겹겹이 산성을 쌓고서 지은 백제의 왕궁은 얼마나 찬연했을까 상상해 본다.
고요한 여름 저녁 무렵에 정림사지로 발길을 옮긴다.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료로 야간 관람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서다. 정림사지는 부여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제의 대표적인 절터다. 성왕이 538년 사비로 천도하면서 백제 중흥의 염원을 담아 정림사도 함께 창건했다.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시대 가람 배치를 보여주는 사찰로, 고대 동아시아 평지 사찰의 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이라 평가받는다. 금당 앞에는 백제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1400여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오층석탑이 서 있다. 가까이서 보니 8.33m 높이의 석탑의 기세가 장중하다. 검박하지만 우아하고, 단정하지만 단조롭지 않으며, 웅대하지만 위압적이지 않다.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운 민흘림 기법을 적용해 상승감이 느껴진다. 삼국시대 때 세 나라는 6세기 말까지는 주로 목탑을 만들다가 7세기부터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목탑에서 벗어나 석탑이라는 고유의 양식을 완성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신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방정맞게도 탑신과 옥개받침에 백제 정벌을 자랑하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이 때문에 ‘평제(平濟)탑’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오층석탑은 분명 백제의 유산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며 석탑 너머 하늘이 붉어진다. 백마강변에서 본 신동엽 시비에 새겨진 시, 「산에 언덕에」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석탑과 작별을 고한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 울고 간 그의 영혼 /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니.”
부여 여행자 노트
국립부여박물관 | 백제 미술의 걸작이라 불리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한 유물 1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백제가 남긴 예술미를 흠뻑 느껴보자.
궁남지 |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한 인공정원. 백제인은 이토록 아름답게 정원을 꾸미는 기술을 일본에 전수했다.
백제문화단지 | 삼국시대 백제왕궁을 재현한 곳으로 사비궁과 능사, 생활문화마을, 개국 초기 궁성인 위례성 등을 둘러볼 수 있다.
글, 사진 우지경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