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표현하는 단어는 분야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21세기가 ‘바다의 시대’라는 말을 과장된 수사로 여기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랴비닌(Vladimir Ryabinin) 유네스코 정부간해양학위원회(IOC-UNESCO) 사무총장은 “바다야말로 빈곤을 종식하고 식량 안보를 확보하며 고용을 창출하고 기술 혁신을 북돋아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이 거대한 잠재력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바다가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할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이전 시대의 셈법을 바다에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인류는 바다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셈법을 이해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잠재력
요즘 인류의 미래와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들은 인공지능, 혹은 4차산업혁명이다. 기술 혁신의 속도를 감안하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산업혁명이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라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이 티벳 산골짜기에서부터 아프리카 사막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모든 인류의 삶’에 골고루 스며들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인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에 반해 바다가 품고 있는 잠재력과 가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지구적 규모’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바다가 선진국이나 저개발국 할 것 없이 인류 전체의 생존을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임을 증명하는 통계와 분석도 한둘이 아니다.
2015년 세계자연기금(WWF)이 지구변화연구소, 보스턴 컨설팅그룹과 함께 펴낸 『해양 경제 되살리기: 8대 실천 조치』(Reviving the Ocean Economy: The Case for Action)는 바다의 총 자산가치를 약 24조 달러로 평가했다. 이는 어업이나 양식 같은 직접 생산물과 관광 등의 서비스, 무역과 운송, 이산화탄소 흡수 등의 부가 혜택을 포함해 보수적으로 산정한 수치며, 석유나 천연가스, 산소 생성과 기후 조절 같이 평가 데이터가 없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제외한 것이다. 카를로스 로페즈(Carlos Lopez) 유엔 아프리카경제위원회(UN Economic Commission for Africa) 사무총장은 “전 세계 고용 인구의 4분의 3이 바다 및 물과 연관이 있는 일을 하고 있으며, 해양 재생에너지는 현재 지구 전체 에너지 수요의 4배를 충당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도 말했다.
지구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대륙인 아프리카에서도 바다의 미래 가치는 절대적이다. ‘사막과 초원의 땅’이라는 통념과 달리, 아프리카 54개국 중 38개국은 바다에 접해 있고 이들 국가가 관할하는 해양 면적은 아프리카 전체 육지 면적의 3분의 2에 육박한다. 카를로스 로페즈 사무총장은 “바다에서 아프리카의 잠재력은 아직 폭발하기 전”이라며, “전체적이며 통합적인 접근과 개발을 통해 아프리카의 블루 이코노미를 꽃피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량자산과 파산의 갈림길에서
문제는 바다에 거는 인류의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지금 전 세계 바다에서는 여러 가지 위기 징후가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지난 수천 년간 육지에서 생산된 오염물을 하천과 바다에 버려 왔고, 이는 여러 환경 규제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세플라스틱을 포함한 플라스틱 쓰레기, 바다의 부영양화를 유발하는 오폐수나 비료 등, 전 세계 해양을 오염시키는 오염물의 80%는 육지로부터 온 것이다. 거대한 면적과 부피 덕에 바다는 지금껏 이러한 오염물을 자체 정화해 왔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예를 들면 바다는 인간 활동으로 대기 중에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26%를 매년 흡수하지만, 이산화탄소가 분해되어 생성되는 탄산가스로 인해 오늘날 바닷물의 산성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30%나 높아졌다. 1880년부터 2012년까지 지표면 평균 온도는 약 0.85도 상승했고 증가한 열의 약 93%를 바다가 흡수했지만, 이는 지난 50년간 평균 해수면 온도를 0.31도에서 0.65도까지 높이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변화는 해양 생태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해양 생태계의 보고라 불리는 산호초는 지금 추세대로라면 2050년쯤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오염으로 인해 바닷물의 용존 산소량이 너무 낮아 생태계를 지탱할 수 없는 전 세계의 ‘데드 존’(dead zone)은 현재 이탈리아 국토 면적과 비슷한 넓이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앞서 바다의 자산 가치를 24조 달러로 평가했던 세계자연기금의 브래드 애크(Brad Ack) 해양부문 선임부회장은 이같은 통계를 언급하며 “인류는 지금 바다라는 거액의 자산에서 계속 인출만 하고 있는데, 괄목할 만한 재투자가 없다면 우리 앞에 남는 건 파산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과학으로 ‘바다의 파산’을 막아라
다행히 ‘바다라는 자산의 재투자 없는 인출은 곧 파산’이라는 명제에 대해 국제사회는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유엔이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국제해양과학 10개년 계획’(United Nations Decade of Ocean Science for Sustainable Development 2021-2030)을 발표하며 “해양 건강의 쇠락하는 사이클을 되돌리고 각국이 해양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도록 과학이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 것도 바다를 이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는 데 회원국들이 뜻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유엔 총회의 결정에 따라 이번 10개년 계획의 준비를 맡은 유네스코 정부간해양학위원회는 ▲ 안전하고 ▲ 지속가능하며 생산적이고 ▲ 투명성과 접근성이 보장되고 ▲ 깨끗하고 ▲ 건강하며 회복력이 강하고 ▲ 예측 가능한 바다를 만든다는 여섯 가지 목표 하에 지난달 13-15일 첫 번째 글로벌 계획 회의(Global Planning Meeting)를 열었다.
유네스코는 특히 바다의 지속가능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부와 각 경제 주체들이 과학적으로 도출된 데이터와 연구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11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처음 열린 ‘지속가능한 블루 이코노미 컨퍼런스’(Sustainable Blue Economy Conference)에서 블라디미르 랴비닌 정부간해양학위원회 사무총장은 “이번 컨퍼런스가 보내는 분명한 메시지는 블루 이코노미 관련 논의에서 과학을 주변부가 아니라 전면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관광, 재생에너지, 수산업, 환경보존 등, 하나의 바다를 두고 서로 상충할 수 있는 인간의 활동들을 적절히 조율하기 위한 정책은 해양 환경에 관한 과학적 데이터와 지식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자동관측기기 등의 신기술이 바다 활용 계획 수립 단계에서 적절히 활용되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유네스코와 국제사회도 이러한 과학적 데이터나 해양 환경 관련 기술을 저개발국들에게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대양, 바다, 해양자원의 보존과 지속가능한 이용’을 내용으로 하는 지속가능발전 14번 목표(SDG 14)의 세부 목표 중 하나로 ‘(군소 도서국 및 최빈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정부간해양학위원회의 기준과 해양기술이전에 대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해양기술을 이전한다’고 명시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바다를 지킬 시민들의 힘
이처럼 지난 수천 년간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 이상의 자원을 희생시키는 데 익숙했던 인류는 바다라는 마지막 미개척지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가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전문가는 아직 찾기 힘들다. 당장 2015년에 전 세계의 축복 속에 합의된 파리협정(2025년까지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목표 수치 이하로 줄여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을 제한키로 한 조약)이 정치적인 이유로 큰 부침을 겪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국제사회가 한 합의와 약속은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다를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활용하기 위해 정치·경제적인 양보나 희생이 필요할 때, 과연 각국은 지금의 약속에 대해 어떤 의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정치·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나라들은 지금의 약속을 원래의 뜻 그대로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유네스코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바다와 인류의 공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진 시민들이 큰 힘이 될 것이라 보고 ‘해양 문해’(ocean literacy)를 위한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해양 문해란 ‘바다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의 삶이 바다에 끼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언뜻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유네스코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은 우리의 일상이 바다의 건강과 지속가능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17년 유엔 해양 컨퍼런스 이후 추진하고 있는 것이 ‘모두를 위한 해양 문해’(Ocean Literacy for All) 이니셔티브다. 유네스코는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블루 이코노미를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국가 간 약속들이 실천으로 옮겨지도록 도울 ‘바다의 후원자’(global constituency for the ocean)가 늘어날 수 있다고 보고, 그 일환으로 지난 2월 『모두를 위한 해양 문해 교육자료』(Ocean Literacy for All: A Toolkit)를 발간했다. 39개국이 교육 현장에서 시험 활용 중인 이번 자료에서 유네스코는 “지금까지 바다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야는 해변으로부터 결코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오늘날의 최신 데이터와 시각화 도구를 활용한다면 바다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대중의 지평을 한층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유네스코는 “바다에 대한 대중의 지식과 경험이 늘어나고 해양 과학과 바다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이며 신뢰성 있는 정책도 만들어질 것”이라 강조한다.
해변에 서서 바라보는 대양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품어줄 ‘어머니 자연’의 모습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넓고 깊은 곳으로부터 바다는 우리에게 다급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쌓은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인류는 그 메시지에 응답하는 방법을 어느정도 찾은 듯 보인다. 다만 그 대답이 공허한 말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이제는 온 몸으로 우리의 의지를 바다에 보여줄 차례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