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정책회의 2022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세계문화정책회의(MONDIACULT 2022)가 열렸다. 회의에 참가한 각국의 문화 장관과 문화예술 분야 시민사회단체 및 기구 등은 3일간의 논의 끝에 멕시코선언을 채택하고 글로벌 공공재로서 문화의 다양성과 공공성,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 협력하며 함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했다.
초대형 허리케인이 멕시코만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회의 기간 내내 멕시코시티는 화창했다. 공식 개회식이 열리는 내셔널 오디토리움의 계단을 오르자 형형색색 참가국들의 대형 국기들이 각국 대표단을 맞았다. 행사장 안에서 참가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회의 무대를 수놓은 대형 배경 커튼이었다. 멕시코의 주식이자 지구의 생명을 상징하는 옥수수 껍질 3만 5000개로 만든 10여 미터 높이의 이 거대한 커튼은 참가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1982년 멕시코에서 첫 회의가 열린 지 40년 만에 다시 멕시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정책회의는 각국 문화장관을 비롯해 문화예술 분야 국제 비정부기구 및 시민사회기구 대표 2600여 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우리나라도 대표단을 보내 참가한 바 있는 1982년의 1회 회의는 문화의 개념을 크게 확장한 기념비적인 회의로도 기억되는데, 그래서인지 이번 회의 역시 아직 코로나19 팬데믹이 종식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세계 150개국에서 135명가량의 문화 분야 장·차관들이 참석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회의는 ▲새롭게 강화된 문화정책 ▲위기의 유산과 문화다양성 ▲창의경제의 미래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문화 등 네 개의 주제별 세션으로 나뉘었고, 각국 대표단은 사전에 선호 주제를 정해 참석 후 기조연설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9월 29일 오전 새롭게 강화된 문화정책을 주제로 열린 세션에 참석한 한국은 이용자의 접근성 강화와 온라인 저작권 보호 및 인공지능 활용, 문화예술 관련 디지털 교육 강화 등을 디지털 전환에 따른 문화 정책의 우선 과제로 꼽았다. 전병극 문체부1차관은 기조발언에서 “첨단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이 결합해 이용자들은 더 많은 자유와 권한, 새로운 경험을 누리게 되었다”면서 “첨단 기술을 활용한 창작 활동이 활성화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둘째 날 행사는 멕시코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다 지금은 문화단지로 탈바꿈한 로스 피노스(Los Pinos) 문화단지에서 열렸는데,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큰 타격을 받은 세계 문화예술계의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기획한 ‘ResilArt 100’ 전시에서는 세계 각지의 문화계 인물 100인이 이번 회의에 참가한 세계 문화장관들에게 바라는 바를 간결하게 전달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행사 마지막 날인 9월 30일에 참석자들은 그간 합의된 결과를 한데 모은 멕시코 선언을 채택했다. ▲공공정책, 협력, 지속가능발전 ▲문화, 위기 상황, 무력 분쟁 ▲평화와 존엄을 위한 문화유산 지지 ▲창의경제와 디지털 대전환 등에서 다자 협력과 정보 공유를 강화하는 내용에 기초한 멕시코 선언의 핵심은 문화를 글로벌 공공재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문화를 세계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공동으로 누릴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임을 천명한 것이다. 유네스코가 문화를 글로벌 공공재라고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전 세계 문화장관들이 함께 모여 이를 공식 선언하고 모든 당사자들이 유엔이 정한 2030년 지속가능발전목표 이후에도 이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겠다고 합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각국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25년부터 4년마다 세계문화정책포럼을 열고 세계문화정책보고서를 발간하는 것에도 합의했다.
한편, 선언 채택 직후 리투아니아가 주도하고 48개국이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성명이 발표됐다. 시모나스 카이리스 리투아니아 문화장관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워버리려는 행위를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유네스코헌장과 협약을 침해하는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영국 등 48개국 대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지를 표명했으며, 이들은 세르게이 오르비발린 러시아 문화차관이 “문화를 정치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반박 발언을 할 때 일제히 회의장에서 퇴장하며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번 회의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띈 것은 행사장에서 플라스틱과 비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행사 안내서는 재생 종이로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고 소박하게 제작됐고, 참가자들의 행사장 출입증도 두꺼운 종이 위에 스티커 한 장만을 붙여 만들었다. 출입증에 물이 닿으면 사진이 그대로 번지기도 했지만, 이로 인한 불편함보다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이행하려는 멕시코 정부의 작은 노력이 더욱 인상 깊었다.
김용범
문화커뮤니케이션팀 선임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