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을유해방기념비 지킴이로 나선 학생들
지난 5월, 대전대신고등학교의 문화진로탐방반, 방송반, 오량신문편집반, 영상반 동아리 학생 20여 명이 대전 보문산에 있는 ‘을유팔월십오일기렴 해방기념비’를 답사했다.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고, 이를 더 잘 보전하기 위해 힘을 모은 학생과 교사들의 유네스코학교 활동기를 소개한다.
‘을유팔월십오일기렴 해방기념비’(이하 을유해방기념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듬해 8월 15일에 대전역 광장에 세워진 기념비다. 한자로 그 이름을 새긴 당시의 일반적인 기념비와 달리 을유해방기념비에는 그 이름과 내용이 모두 한글로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전역 광장에서, 심지어 전국 곳곳의 비석이 사격 연습용으로 쓰이기 일쑤였던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이 기념비는 너무나 깨끗하게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광복! 해방! 민족!’이라는, 서로 다른 이념과 대립을 초월해 남과 북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그 무엇이 을유해방기념비를 지켜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광복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기념비는 지금은 원래의 자리인 대전역 광장이 아닌, 보문산 깊은 산속에 외로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이원준 학생(2학년)도 이 점을 못내 가슴 아파했다. 온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맞아, 대전 시민들이 대전역 광장에 자랑스럽게 세운 을유해방기념비를 더는 이렇게 산속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유호 학생(2학년) 역시 을유해방기념비를 대전시민이 잘 볼 수 있고, 잘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며 이를 거들고 나섰다.
학생들은 을유해방기념비의 존재를 아는 대전시민들이 1%도 안 된다는 것도 안타까워했다. 현장 답사를 다녀온 후 학생들은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임재근 대표를 초청해 ‘한국전쟁과 평화운동’을 주제로 을유해방기념비의 역사적 의미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학생들은 반만년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한은 대륙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실상의 섬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면서 ‘해방’을 노래했던 을유해방기념비를 통해 이제는 모두가 ‘통일’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학생들은 을유해방기념비의 존재와 가치를 알리기로 의기투합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활용하여 피켓과 구호를 만들었다. 모둠을 나누어 아침과 점심시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문 캠페인과 급식실 캠페인, 매점 캠페인을 일주일동안 진행했다. 캠페인을 이끈 임주왕 학생(2학년)은 “많은 학생에게 알릴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하여 정말 뜻깊고, 학생들이 보고 가는 짧은 시간 안에 더 효율적으로 을유해방기념비를 알릴 수 있는 활동에도 참여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네스코학교 담당 교사인 문가람 선생님과 동료 역사교사인 윤상인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이번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 번 놀랐다고 한다. 해방의 날을 기리기 위해 대전역 광장 한복판에 대전 시민들이 커다란 한글 기념비를 세웠다는 사실을 자신들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점이 그 첫 번째고, 대전에도 을유해방기념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두 번째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놀라움은 그저 장난꾸러기인 줄만 알았던 학생들이 답사 후 을유해방기념비 이전 캠페인을 펼쳤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역사교사로서 이미 7-8년 전부터 을유해방기념비를 홍보하고 이전 캠페인 활동을 펼쳐 왔고, 그렇기에 이러한 활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우리지역의 문화유산 답사와 캠페인 활동을 유네스코학교 프로그램과 연계하면서 답사와 토론회, 초청강연, 캠페인 활동 등을 보다 활발히 펼칠 수 있었고, 학생들의 관심과 반응도 자연히 높아졌다. 이제 학생들은 ‘을유해방기념비를 잊은 대전에는 미래가 없다’, ‘대전의 광복이 보문산에 잠들어 있다’와 같은 문구를 통해 을유해방기념비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광복’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을유해방기념비는 바로 그러한 날을 기억하고,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자는 우리의 다짐이다. 이 유산을 더 잘 지키고 가꾸려는 학생들의 노력을 지켜보노라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한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최장문
대전대신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