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전염병으로 세상이 잔뜩 움츠러든 봄날, 예년이라면 새학기 개학과 더불어 학생들로 북적였을 박물관도 전례없이 고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과학과 의학이 최일선에서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가운데, 지금 당장 돋보이지는 않지만 문화의 힘 역시 인류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식과 역사의 보고로서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해 온 박물관은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유네스코뉴스』는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만나 위기 속에서 문화가 갖는 의미와 21세기 박물관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먼저 요즘 같은 시기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지금 전 국민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문화’만이 갖는 고유한 역할과 의미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문화는 인간의 의식 속에 누적되어 온 행동의 규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난관이 오든지 극복할 수 있는 노하우를 포함하고 있는 거죠. 일종의 인간 지성이 집대성된 클라우드 시스템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위기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이라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의 바탕 위에 누적된 지식은 그 무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집행위원 활동을 비롯하여 유네스코와의 인연이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유네스코와 연을 맺게 된 계기와 함께, 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교 때 공부하던 교과서 맨 뒷장에 ‘유네스코와 운크라의 지원을 받아⋯’라고 써 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당시엔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이미 그때부터 유네스코라는 이름이 잠재의식 속에 들어와 있었을 겁니다. 이후 대학교에서 고고인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유네스코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계시던 스승인 김원용 교수님을 통해 유네스코를 더 가깝게 접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유네스코와 직접 관계를 맺게 된 것은 2004년 서울세계박물관대회를 준비하는 조직위원회의 사무총장을 맡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후 유네스코와 함께 여러 사업을 진행하면서 국제적인 문화분야 활동들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네스코가 국제사회 문화분야 주요 이슈와 관련해 발간한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국제사회 담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12년 11월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제190차 유네스코집행이사회에 참가했던 경험입니다.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께서 유네스코를 방문해 1956년 출판된 우리나라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를 기증하고, 그 책으로 공부하여 오늘날 한국의 발전을 일궈낼 수 있었다면서 전후 한국의 교육 재건을 위해 헌신해 준 유네스코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순간을 함께하며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던 것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국제푸른방패(Blue Shield International) 집행위원 등 지금도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국제협력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문화분야 국제활동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과거에 비해 국제사회가 한국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탈퇴하면서 유네스코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울 만큼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형문화유산 분야에서 한국의 역할이 크고, 정부도 유네스코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유네스코를 통해서 우리와 교류를 희망하는 나라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20년 전만해도 세계유산과 관련된 국제사업을 고민하면서 “뭘 해야할까?”를 고민했는데, 요즘은 국제적으로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진 것이 오히려 고민거리가 된 것 같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현장’으로서 박물관의 문화적 교육적 역할을 강조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기술발전으로 박물관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유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박물관의 역할과 기능도 변화되어야 할까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되고 여러 가지 다양한 기법이 등장하면서 박물관의 역할 자체가 줄어들 것이라 우려하는데, 저는 그건 기우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콘텐츠는 박물관의 ‘복사본’으로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실물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D와 3D가 느낌이 다르듯이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실물을 보는 종합적 체험은 ‘가상현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어떤 것을 본다는 건 ‘한 부분’을 본다는 것이지 절대로 ‘전체’를 본다는 게 아니거든요. 박물관에서 실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실물만이 갖는 질감 등 다양한 요소를 오감을 통해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디지털로 100% 완벽히 구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으로 디지털에 몰입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가치가 이입된 공간 속에 들어가 보는 것은 가상의 체험과는 별개로 인간이 항상 희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자연공간이자 문화공간이며, 인간은 생물과 인간의 복합적인 층위 속에서 안심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잘 만들어진 디지털 공간이라 해도 그것이 진짜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디지털이 풍성해지면 풍성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원형’에 가치를 두기 시작할 겁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생긴 지 이미 3000년이 넘었습니다. 이러한 공간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좀 전에 문화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집대성된 클라우드 시스템과 같다고 했지요. 박물관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개인과 집단들이 축적해온 정보, 지식, 경험을 모아놓은 공간이고 이를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든 사용하지 않는 지식이든 모두 모아두어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집단 지성의 저장소’로서 말이지요. 이러한 박물관의 기능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선 질문과 관련하여 현재 유네스코협력 자문기구인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에서는 ‘박물관의 정의’를 어떻게 개정하느냐를 두고 열띤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관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유네스코에서 2015년 말에 「박물관 및 컬렉션 보호와 증진, 다양성과 사회적 역할에 관한 권고」(UNESCO Recommenda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Museums and Collections, their Diversity and their Role in Society)를 채택했는데, 그 안에 필요한 정신이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식 혹은 행위의 산물인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해서 대중에게 전시하는 것이 박물관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다만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어떤 기능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박물관의 운영 행태(management practice)에 관한 고민이지요. 그러한 운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평등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생기니까요. 박물관도 지식의 그러한 속성을 유념해서 더욱 포용적인 공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조금 부족한 계층이 더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를 위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하는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국제박물관협의회에서 박물관의 정의와 관련해 논의하고 있는 ‘민주주의’도 비슷한 맥락의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각국이 명시하고 있는 박물관의 정의가 국제박물관협의회의 정의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면 세금 투입이나 법 집행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이를 둘러싼 ‘문구 해석’에 관한 문제로 논의가 길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문제와 별개로 약자와 가난한 사람,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도 평등하게 박물관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박물관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유산을 보호하는 활동과 유산을 둘러싼 개발 활동 간의 갈등은 여러 국가들이 맞닥뜨린 해묵은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그리고 유산의 의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유네스코가 조금 더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누구나 자국의 문화유산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당장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는 측면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인데, 이는 문명사회라면 모두가 겪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가 과제이지요. 유산들이 하나씩 없어진다는 것은 그 유산에 축적된 지식, 경험, 지혜가 함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산을 보호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대중들이 유산의 가치와 보호의 당위성을 잘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법과 제도로 규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자기 고장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산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이 유산이 세계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 경제적으로 얼마다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유산을 어떤 식으로 보호하고 소중히 여길지에 관한 보편적 교육이 더 중요합니다. 유네스코도 이 점에 초점을 둔 활동을 더 많이 펼쳤으면 합니다. 꼭 세계유산이 아니라도 지역의 맥락에서 중요한 유산들에 대한 모범적인 교육활동 사례를 만들고, 그 사례를 여러 나라, 특히 저개발국과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지금도 유네스코가 하고 있는 일이지만 보다 광범위한 협력을 통해 여러 가지 목표를 함께 달성할 수 있도록 활동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국내외에서 그런 사업들을 선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유네스코에 가입한 지 올해로 70년이 됩니다. 한국과 유네스코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70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한국 특유의 시대적·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유네스코 내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된 콘텐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어디에나 (한국을 뜻하는) ‘K’ 자를 많이 붙이는데, 유네스코 내에서도 한국적 모델의 유네스코 활동을 선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K-유네스코’라고 할까요?(웃음) 유네스코의 정신과 더불어 한국의 국가이념인 ‘홍익인간’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정신적·사상적 근간으로 삼아서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재무장해 나간다면 선도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적 모델의 유네스코 활동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질적이며 사무적인 일들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철학적인 방향도 한번쯤 설정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문화팀 전진성 팀장, 장자현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