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및 녹색 사회로의 ‘이중 전환’은 이제 세계 대부분 국가의 발전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지난해 11월에 발간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는 지난 수 년간 각국이 이를 위해 과학 분야에서 많은 투자와 연구를 해 왔음에도 국가 및 지역 간, 그리고 분야 간 불균형이 적지 않게 발견됐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지속가능발전의 바탕이 될 이중 전환을 온전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보다 평등하고 포용적이며 개방적인 과학을 향한 국제 협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중 전환 달성을 위한 경주
21세기 이후 세계의 경제, 교육, 사회 전 영역에서 부는 ‘디지털’과 ‘녹색’의 바람은 이제 인류 공통의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경제와 과학 분야를 선도해 온 선진국에서부터 제3세계 저개발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은 이 두 영역에서의 발전을 중심으로 자국의 경제 및 사회 체제를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2015년 유엔 회원국들이 2030년까지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달성하기로 합의한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국의 발전 계획 수립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경제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담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의 도입을 통한 더 똑똑한 생산 및 소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인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네스코가 발간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UNESCO Science Report)는 ‘보다 똑똑한 발전을 위한 시간과의 경주’(The Race against Time for Smarter Development)라는 주제하에 세계 각국의 과학계와 관련 정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같은 변화를 진단하고, 전 세계가 평등하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디지털과 녹색의 이중전환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제시했다.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발간사에서 “이번 보고서의 부제와 같이, 과학이 전 인류에게 공평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면서 “이를 위해서는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보여줬듯 국경을 초월한 과학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736쪽에 달하는 이번 보고서에 실린 자료를 분석해 보면, 국가별 발전 수준과 관계 없이 각국이 디지털 기술을 미래 경제의 경쟁력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018-2019년 사이 전 세계에서 발간된 범분야 과학 출판물 중에서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 관련 출판물의 수는 275,577건으로 1위를 차지했고, 전기차 배터리나 친환경 발전 등과 관련된 에너지 분야 출판물이 215,863건으로 그 뒤를 이었다(그림1). 주목할 만한 부분은 흔히 차세대 첨단 과학기술 분야로 꼽히는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 분야에서 개발도상국 이하 국가에서 나온 관련 연구 출판물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에 각각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 분야 전체의 13.8%와 35.7%를 차지했던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출판물 비중은 2019년 10.8%와 25.2%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인도의 해당 분야 출판물 비중은 9.1%에서 18.1%, 인도네시아는 0.8%에서 2.2%로 높아졌다. 산업화에서는 뒤처졌던 국가들도 디지털과 환경으로 대표되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인더스트리 4.0)으로의 이행에서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관련 정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19년 4차 산업혁명을 위한 대통령 위원회를 설치해 학계, 산업계, 정부 등 다양한 영역으로부터의 의견을 모으고 있으며, 카메룬은 ‘디지털 카메룬 2020 전략 계획’(2017)을 세운 뒤 2019년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인공지능 및 로봇 공학 관련 연구 출판물 비중을 기록하기도 했다.
당찬 포부, 그렇지 못한 현실
하지만 유네스코는 관련 연구 분야 출판물 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이 곧 각국이 디지털 및 녹색 경제로의 이행이라는 병렬적 어젠다를 순조롭게 실행해 나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출판물 데이터의 추세가 정부 정책 우선순위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사회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며, “지식 생산 그 자체는 사회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치 못하므로, 여기에 정치적 의지가 뒷받침되어야만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곧 이중전환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서는 과학 연구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 및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전략적인 선택에 따른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정부의 뒷받침과 국민들의 의지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고서는 이중전환 달성을 위해 “데이터 센터, 고성능 컴퓨터 시설, 태양광 및 풍력 발전 설비 등 인프라 개발에 대해 대규모의 동시적 투자가 필요하고, 이런 투자는 규제 개혁, 미래 인력 시장에 나올 신세대 교육, 기술 및 직업에 대한 정비와 결합되어야” 하며,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 도로와 항만, 파이프라인, 철도 등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존의 수송 네트워크까지 현대화해야 하므로 “더욱 복잡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산업화를 선도하지 못했던 후발주자들이 21세기의 이중전환 과정에서도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 격차를 줄여 나가기 위해 선진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함께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일례로 디지털과 녹색 전환 모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에너지 분야의 경우, 현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전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인구는 전체의 약 절반(48%)에 불과한 실정이다. 보편적 전기 보급 없이 산업화와 디지털 경제를 준비하는 것에 그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아프리카의 인터넷 보급 속도 역시 여전히 더디기만 해, 2015-2019년 아프리카 전체의 인터넷 보급률은 0.2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국가 간 격차를 해소하지 못한 채 이중전환을 위해 ‘각개약진’을 펼치는 것은 또 다른 ‘불균형의 시대’를 열어젖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려한다.
디지털 및 녹색 전환이 사회 내부의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각국 정치권은 전환 과정에서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일자리 수 감소가 나타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저항 역시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보고서는 “디지털 전환의 경우 자동화가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며, 녹색 전환의 경우 석탄 발전소처럼 현재 대량의 노동력이 고용되어 있는 대규모 오염 산업이 단계적으로 폐지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라고 분석하고, “이러한 우려 때문에 어떤 국가는 신규 석탄 발전소가 비경제적으로 판명되리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허가를 내 주기도 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우려와 저항은 2040년까지 ‘제3차 에너지 기본계획’에 맞춰 원자력발전의 점진적 감축을 천명한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보고서는 원자력의 단계적 폐지 결정이 원자로 건설의 선두 주자인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국내의 우려를 전하는 한편,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 움직임이 재래식 에너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저항을 받아 “파리 협정이 체결된 후 4년(2016-2019) 동안 캐나다, 중국, 유럽, 일본, 미국의 35개 은행이 총 2조 7000억 달러를 화석 연료에 투자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인도 정부의 ‘스마트 도시 형성 자금’의 80%가 지역 기반 개발에 투여됨으로써 도시 인구의 극히 일부만이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점, 경제 디지털화를 위한 시스템 구축에 따라 현금 경제에 기반한 경제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점 등을 예로 들며 이중전환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여러 불평등 요소들을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녹색 전환, 더 깊고 더 넓게
포용과 협력 없는 이중전환이 국가 간, 혹은 사회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보고서는 디지털 및 녹색 전환 관련 트렌드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가들이 기후변화 대처를 위한 더욱 적극적인 과학 연구 및 정책 도입에는 주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과학을 똑똑한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Are We Using Science for Smarter Development)라는 제목으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룬 2장에서 보고서는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대규모 자연재해가 특히 저개발국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지만, 각국의 녹색 분야 과학 연구는 기후변화로 인한 지역적 재난에 대처하는 데 치우쳐 있을 뿐, 전 지구적인 근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분야의 연구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림2). 예를 들어 최근 강력한 허리케인이 연달아 발생해 극심한 사회적 충격을 받은 바 있는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기후 재앙에 대한 보다 회복력 있는 인프라 구축에 관심이 많고, 저소득 국가들은 식량난 극복을 위해 기후 변화에 적응력을 갖는 작물 개발 등에 주로 투자를 하고 있다.
물론 이들 분야가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 없다. 하지만 지구촌의 여러 재난과 식량 생산량 감소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낮추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거시적인 연구와 협력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중요한 분야로 탄소 포집 및 저장 관련 연구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탄소 포집 및 저장 분야의 연구와 실용화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세계 전체 인공 탄소 포집량은 3500만 톤으로, 이는 “바다가 매년 포집하는 40기가톤의 탄소량에 비하면 한두 방울에 불과할 정도”다. 세계에너지기구(IEA)는 2060년까지 ‘클린 에너지 시나리오’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약 107기가톤 가량의 탄소 포집 및 저장 능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해당 분야에서 2019년에 간행된 과학 출판물 수는 2501개로 주요 분야 중 최하위 수준의 증가폭을 기록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 중 기후변화 예방 및 환경·생태계 보전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목표들인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SDG12), ‘기후행동’(SDG13), ‘해양 생태계’(SDG14), ‘육상 생태계’(SDG15) 등은 2000-2013년 사이 가장 적은 기부금 액수를 기록했다. 해당 기간 이들 분야가 받은 기부금 총액은 250억 달러 미만으로 같은 기간 ‘산업, 혁신, 인프라’(SDG9)에 투입된 1300억 달러와 큰 대조를 이룬다.
다 함께, 똑똑하게 나아가기 위해
인류의 미래는 과학에 달려 있으며, 과학을 똑똑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유네스코가 매 5년마다 폭넓은 조사와 자료 수집 및 분석을 통해 내놓는 『유네스코 과학보고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매번 발간될 때마다 보고서들은 ‘과학의 똑똑한 발전’이 연구 보고서의 양이나 투자 금액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효율적이며 평등하게, 모든 인류를 위해 활용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매 보고서에서 드러난 우리 인류의 과학 발전상은 희망과 우려를 동시에 안겨줘 왔다. 늘 새로운 혁신과 도약을 보여주는 여러 지표들은 눈부시지만, 과학계의 폭넓은 협력과 평등 달성 현황 등은 늘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로봇공학, 에너지·환경 분야 등에서 과학계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유네스코가 찬사보다는 경고를, 희망보다는 우려를 더 강조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이번 과학보고서 역시 디지털과 녹색 전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뒤쫓고 있는 전 세계 과학계에 이 경주의 궁극적 목표가 발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과실을 고루 나누어 갖는 데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 보고서가 보여주는 것은 과학이 단지 지식과 기술과 혁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라는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말처럼, 인류가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디지털 및 녹색 미래라는 꿈을 붙잡기 위해서는 경쟁과 배제가 아닌 협력과 참여를 그 핵심 열쇠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