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네스코의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 70년
지식과 정보는 만들어서 갖는 것 이상으로 널리 공유하고 올바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유네스코의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 활동이 미디어 지원과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지식·정보의 공정한 활용과 윤리 측면으로 확장돼 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유네스코 가입 이후 70년간 이어 온 한국의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 활동에는 그러한 과정과 고민이 담겨 있다. 교육·과학·문화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한편, 이를 널리 알리고 모두가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 온 70년의 여정을 살펴본다.
자유롭고 공정한 정보의 물줄기를 기다리며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50-60년대 한국의 매스미디어에는 전문성을 높이고 선진 기술을 도입·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당시 아이디어와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 방법,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활용한 사회적 소통 문제 등을 고민하며 선구적인 연구와 국제 논의의 장을 만든 유네스코의 활동에 한국이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다. 이에 한국은 1967년 12월에 ‘아이디어 및 정보의 자유 소통 촉진 방안 연구 세미나’를 개최했다. 학계 및 언론계 대표들과 정부기관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해 매스미디어의 보급과 한국의 당면과제, 전문요원 양성, 교육을 위한 매스미디어의 활용 등 8가지 주제를 논의한 이 세미나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알리고 합리적 적용 방법을 논의한 정책토론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 유네스코의 이념을 국내에 알리고 소통하는 것 또한 초창기 국내 유네스코 정보·커뮤니케이션 사업의 과제였다. 그 일환으로 1964년 1월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발간한 『유네스코뉴스』는 현재 769호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유네스코 관련 활동을 알리는 창구로 꾸준히 활약해 오고 있다.
교육·과학·문화를 통해 이룩한 성과가 평화 구축의 밑바탕이 되길 원했던 유네스코는 각 분야에서 축적된 지식과 정보가 더 널리, 멀리 흐르도록 도울 커뮤니케이션 영역의 활동을 중시했고, 이 때문에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도 유네스코의 핵심 사업 분야로 자리잡았다. 유네스코는 이 분야의 활동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언론 활동 보장 및 언론인의 안전이라는 전통적 의제뿐만 아니라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전 세계에 뿌리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유네스코의 이러한 활동은 1970년대 후반 국제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른바 ‘신국제정보질서’(New Worl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Order)를 둘러싼 논쟁 때문이다.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은 ‘정보의 유통은 자유로울뿐만 아니라 균형 잡힌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76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19차 유네스코총회에서 정보 생산 및 유통을 몇몇 강대국이 독점하는 상황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1980년 제2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커뮤니케이션 문제 연구에 관한 국제위원회’(일명 맥브라이드 위원회)가 해당 의제에 관한 조사 결과를 담아 발간한 보고서인 『Many Voices, One World』(맥브라이드 보고서)가 채택됐다. 하지만 서방 언론 중심의 정보 유통 체제의 변화를 골자로 하는 이 보고서는 주요 선진국, 특히 미국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급기야 미국은 제3세계 중심의 신국제정보질서 운동을 ‘언론 자유 침해’로 규정하며 1984년 유네스코를 탈퇴했고, 유네스코는 커다란 정치적·재정적 위기를 맞게 된다.
세계를 양분한 격랑 속에서 한국 역시 정보 유통 질서의 재정립과 관련한 논의에 참여하고 국내외 활동을 펼쳤다. 한국은 1981년 11월에 ‘새 국제정보질서와 한국’을 주제로 세미나를 여는 한편 맥브라이드 보고서의 국문판인 『세계는 진정 새로운 정보질서를 원하는가』를 발간해 국내 논의에 불을 지폈다. 또한 국가 간 정보 격차를 줄여 새롭고 공명정대한 세계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설립한 ‘국제 커뮤니케이션 개발사업’(IPDC)에도 적극 참여했다. 국제 이슈와 관련된 학술 연구와 더불어 국내 미디어 수준 향상을 위한 미디어 교육 관련 활동도 본격적으로 펼쳤다. 1983년에는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해를 맞아 ‘사회변동과 커뮤니케이션의 전문성’이라는 주제로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1985년에는 신국제정보질서의 맥락에서 ‘커뮤니케이션 정책’ 개념을 연구, 새로운 정보사회에 대비해 올바른 커뮤니케이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같은해에는 미디어 교육에 대한 인식이 미비한 국내 현실을 개선하고자 서강대 최창섭 교수에게 의뢰해 미디어 교육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 결과물을 담아 발간한 단행본 『미디어 교육론』은 미디어 교육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연구 서적으로 꼽힌다.
소통과 협력, 그리고 성찰
경제적·문화적 측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은 1990년대 들어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의 역량과 영향력도 급격히 높아졌다. 이에 IPDC를 비롯해 정부간 정보화 사업(IIP), 일반 정보화 사업(PGI) 등 유네스코가 설립·운영한 국제 네트워크에서도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을 이어갔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방송공사(KBS)가 10차례에 걸쳐 진행한 IPDC 방송인 연수는 총 86개국 154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개발도상국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바 있다. 한국은 또한 1989년부터 10년 동안 IIP 사무국을 통해 매년 20만 달러를 지원,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개발도상국의 정보 통신 기반 구축 사업을 지원함으로써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를 후발 국가들과 나누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가 PGI 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보급한 무료 문헌정보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인 ‘CDS/ISIS’의 한국어판인 ‘TIMS’를 한국산업정보기술원을 통해 개발하고 1996년에는 이를 윈도우 버전으로도 출시함으로써 양질의 문헌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국내에 널리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보의 자유롭고 균형있는 유통을 고민했던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에는 급속한 정보화사회 진입에 따른 부작용을 국제적으로 환기하기 위한 ‘정보윤리’가 유네스코의 중요 의제로 떠올랐다. 1997년 유네스코가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개최한 ‘제1차 정보윤리 국제회의’는 그 시발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고속인터넷 등의 정보통신기술 인프라를 본격 확충하며 정보화 드라이브를 펼치던 한국 역시 해당 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한국은 같은해 9월 ‘글로벌 정보네트워크 사회의 의미와 전망’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고, 이듬해에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법적 틀에 관한 아태지역 전문가 회의’ 및 ‘정보윤리에 관한 전문가 포럼’ 등을 열어 학계 및 관련 업계의 논의와 연구를 촉구했다. 특히 2000년 9월부터 2년에 걸쳐 5차례 연속 개최된 ‘정보사회 성찰포럼’은 국내에서 유네스코 정보윤리 관련 활동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행사였다. 2000년 9월에 ‘디지털 시대와 인간 존엄성’을 주제로 열린 첫 번째 정보사회 성찰포럼에서는 디지털 정보 기술의 발달과 사생활 보호 문제를 조망했고, 같은해 12월 열린 2회 포럼에서는 ‘디지털 정보, 누구의 것인가’를 주제로 디지털 시대를 맞아 크게 위협받는 지적 재산권 문제를 다룸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2001년 11월에는 ‘정보기술과 교육’을 주제로 세 번째 포럼이 열렸고, 이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1~3회 포럼의 결과물을 모은 단행본 『디지털시대의 인간 존엄성』을 발간했다. 이어서 ‘온라인 저널리즘의 쟁점과 전망’(4회), ‘미디어 융합의 이해와 대응’(5회)에 이르기까지, 정보사회 성찰포럼은 당시로서는 핵심적인 주제에 관한 시의적절한 논의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정보윤리에 대한 관련 업계 및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보윤리에 대한 이러한 성찰 노력은 2005년 ‘디지털 시대 정보윤리와 프라이버시 국제포럼’, 2006년 ‘지식사회의 미디어와 민주주의 국제회의’ 등으로도 이어지며 정보 수집과 확산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미래 사회에서의 인간의 기본권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보존과 공유 통해 다시 태어난 ‘기억’
인류의 눈앞에 새로이 펼쳐지고 있던 정보화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조망하고, 그에 따른 의제 설정과 지침 마련에 집중하던 유네스코는 1990년을 전후해 전 세계의 기록유산에도 큰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인류가 축적해온 정보와 지식과 기억을 담고 있는 기록물이 집단적 망각과 고의적 파괴, 재난 및 부적절한 관리로 인해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으며, 기록물을 보존하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정보와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흐름을 촉진한다’는 유네스코의 비전에 부합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유네스코는 1992년부터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시작했다. 동 사업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나 무형문화유산 사업과 달리 유네스코의 문화분야 사업이 아닌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배경이다.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뒤쳐지지 않는 기록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을 시작으로 2017년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에 이르기까지 총 16건의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전 세계 4번째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세계기록유산을 등재한 나라가 되었다. 한국 기록유산의 가치를 기리고 기록유산 사업에 공헌하기 위한 상도 한국 주도로 제정됐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고, 인류 공동의 자산인 기록유산 보존과 활용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를 기리기 위해 2004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유네스코 직지상’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매 2년마다 상금 3만 달러와 함께 수여되고 있는 이 상은 청주시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데, 이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한국의 유네스코 관련 활동 전면에 나선 대표적 사례로서도 의미가 각별하다.
유네스코 직지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은 2000년대 이후 기록유산 보존 정책과 기술을 타 유네스코 회원국들에게 전수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9년부터 개최해 오고 있는 ‘세계기록유산 등재훈련 워크숍’이 그 예다. 이 협력 사업을 통해 한국은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 선정에서부터 신청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각 과정에서 필요한 노하우를 다른 여러 회원국들에 전수했고, 그 결과 피지(인도인 계약 노동자에 관한 기록, 2011), 몽골(『알탄 톱치』 황금역사서, 2011), 베트남(레 왕조와 막 왕조의 ‘진사제명비’, 2011), 동티모르(‘국가의 탄생에 관하여: 전환점’, 2013), 미얀마(쿠도도 석장경 불탑들, 2013) 등이 자국의 유산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올바른 정보와 소통으로 만들어 갈 미래
정보의 자유롭고 균형적인 이용에 관한 이슈에서부터 정보화 사회에서의 윤리를 고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유네스코와 한국이 지난 70년간 함께해 온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의 활동들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시점에서 인류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이슈들을 선제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중인 해당 분야 활동들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중심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고민거리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유네스코는 현재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정보화 사회를 ‘포용적인 지식사회’(inclusive knowledge society)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표현의 자유 ▲정보 및 지식에 대한 보편적 접근 ▲문화 및 언어 다양성에 대한 존중 ▲모두를 위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코로나19라는 위기 상황으로 인간 사회 곳곳이 전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포용적인 지식 사회에 대한 유네스코의 비전은 위협과 기대를 동시에 받고 있기도 하다. 위기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위협받게 되는 가치가 바로 포용이며, 그 위기를 해결해 나갈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바로 지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오픈사이언스, 공개교육자원(Open Educational Resources, OER) 등을 통해 위기 해결의 바탕이 될 지식과 정보가 제약 없이 확산될 수 있도록 전 세계가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한편, 각 개인들이 인종·세대·진영 간 차별과 혐오를 격화시킬 수 있는 잘못되거나 조작된 정보를 걸러내고 올바로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도 이러한 유네스코의 입장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하며, 특히 그 어느 때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인 미디어·정보 리터러시(Media and Information Literacy, MIL)를 높이기 위한 국내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관련 기관과 전문가, 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내외 MIL 함양 전략을 논의하고 그 결과를 교육 현장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방안을 모색하는 국제 심포지엄 및 포럼을 개최해 오고 있으며, 특히 오는 10월에는 ‘글로벌 미디어·정보 리터러시 주간’(Global MIL Week)을 맞아 주최국으로서 유네스코 본부와 함께 ‘글로벌 미디어·정보 리터러시 주간 대표회의’를 온라인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위기와 미국 내 인종 차별 사건으로 다시 부상한 허위정보와 표현의 자유 문제,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과 관련한 갈등에서 출발해 세계기록유산 개혁 방안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에 이르기까지, 유네스코의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는 최근 그 어느 때보다 대중들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지난 70년간 유례없는 발전상을 보여 주었으며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던 우리나라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세계적으로 뛰어난 정보통신기술과 관련 인프라, 정보 확산과 소통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그리고 그러한 관심을 건설적이며 포용적인 상호 이해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울 유네스코 활동이 어우러진다면, 지난 70년간의 성과 이상으로 대한민국을 빛나게 해 줄 새로운 미래가 정말로 우리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에서 지구촌 나눔의 주역으로』(2014),
『교과서 한 권의 기적: 유네스코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꿨나』(2015)
· unesco.org “Major Initiatives – Building Knowledge Societies”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