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와 SNS 등 세계를 하나로 묶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전 세계의 아이돌이 된 BTS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문화 산업에서 대륙과 국경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나가고 있는 문화예술계의 제반 환경은 정말 ‘문화적 잠재력을 갖춘 누구에게나’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유네스코는 현재의 환경이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우는 토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남반구(Global South)1) 국가들의 현실에서 여전히 바꿔야 할 부분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1) 지리적 의미의 남반구가 아닌, 주로 개발도상국 이하 저개발국들을 포괄하는 말로 과거에는 ‘제3세계’라는 용어로도 쓰였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들 대부분이 남반구쪽에 치우쳐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와칸다’와 남반구 문화
“2018년 3월에 미국 내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집트, 남아공, 케냐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자주 언급된 아프리카 국가는?”
미 공영 라디오 방송국(National Public Radio, NPR)이 운영하며 개도국 발전 관련 이슈를 다루는 블로그인 ‘염소와 소다’(goats and soda)에서 지난 3월에 낸 이 퀴즈의 정답은 바로 ‘와칸다’(Wakanda)다. 황급히 지도책을 찾아 볼 ‘영알못’(영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와칸다는 지난해 개봉한 SF 액션 영화인 「블랙 팬서」(Black Panther)에 나오는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 이름이다. 「블랙 팬서」는 헐리우드의 대규모 상업 영화로서는 최초로 ‘흑인’ 히어로 주인공과 아프리카 문화를 전면에 내세워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도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이 영화에서 와칸다는 아프리카에 대한 서방 주류 미디어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더 화제가 됐다. 와칸다를 빈곤, 폭력, 범죄와 혼란의 이미지 대신 ‘희귀 자원과 첨단 기술, 문화적으로 세련된 시민을 모두 갖춘 선진국’으로 그려냄으로써 「블랙 팬서」는 세계 영화 업계가 심어놓은 편견으로 고통받던 아프리카 시민들에게 ‘신선한 (문화적) 공기를 주입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문화를 투사하는 새로운 전형을 찾은 데 대한 기쁨이 걷힌 뒤, 아프리카 관련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학계와 문화계는 이 영화가 문화다양성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두고 새로운 논의를 시작했다. 와칸다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문화계 전반의 편견을 바꿀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은 아프리카 문화를 상업적으로 절묘하게 차용한 선진국 문화 산업의 또다른 성공 사례일 뿐일까. 여기에 대해 바실 하무소크웨(Basil N. Hamusokwe) 잠비아 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조교수는 MIT 글로벌 미디어 기술 및 문화 연구소(Global Media Technologies & Cultures Lab) 블로그에 기고한 글에서 주류 문화 산업에서 소외받아 온 계층을 중심으로 이 영화를 환영하는 분위기와는 별개로, 아프리카의 문화를 담은 이 상품이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무소크웨 교수는 “아프리카에 관한 헐리우드 영화가 아프리카를 제대로 그리는 것은 드물고, 아프리카 산(産) 영화조차 가용 자본과 시설의 한계로 온전한 아프리카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한 작가의 발언도 소개했다. 영화가 아프리카에 관한 클리셰(cliché)에서 벗어나 참신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을 높이 사면서도, 이것이 아프리카 문화의 또다른 차용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문화 콘텐츠 생산에 참여하며 기여하고 있는지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참여를 위한 노력
아프리카를 소재로 한 헐리우드의 대표적 히트 상품인 「라이온 킹」을 둘러싼 상표권 분쟁은 선진국 문화 산업이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상품을 내다파는 것이 문화다양성의 확산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1994년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을 선보여 엄청난 성공을 거둔 디즈니는 영화에서 인기를 끌었던 스와힐리 말인 ‘하쿠나 마타타’(다 잘 될 거야)를 티셔츠에 독점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상표권을 등록했고, 이 상표권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사실은 올해 「라이온 킹」의 재개봉을 앞두고 다시 미국에서 화제가 되어 디즈니의 해당 권리를 철회해 달라는 백악관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케냐 출신 작가인 은구기 와 티옹고(Ngũgĩ wa Thiong’o) 미국 UC어바인대 비교문학 교수는 “(하쿠나 마타타에 대한 디즈니의 상표권 등록은) ‘굿모닝’을 상표권으로 등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어떤 사기업도 사람들이 매일 쓰는 말을 소유할 수는 없다”며 분노했다.
이러한 논란과 더불어 일각에서는 디즈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 역시 자신의 문화를 활용해 적절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아프리카 관련 지적재산권을 다루는 블로그 ‘아프로-아이피’(Afro-IP)에서 아이작 루튼버그(Isaac Rutenberg) 케냐 지적재산권위원회 의장은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말과 더불어 디즈니는 상상할 수 없는 수익을 아프리카 문화로부터 뽑아내고 있다”며 “그러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아프리카도 거기서 수익을 얻을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200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협약’(이하 문화다양성협약)은 ‘하쿠나 마타타’를 빼앗기다시피 한 아프리카처럼 문화적 약자 입장에 있는 나라들이 자국의 문화 산업과 문화 관련 종사자들의 힘을 길러 국제 시장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절한 정책을 펼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문화다양성협약은 “각국 정부가 문화를 자국의 개발 정책에 전략적인 요소로 통합시킬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며, 문화 산업의 인프라와 문화 상품과 문화 창작자의 이동성 면에서 분명한 열세에 놓여 있는 개발도상국, 특히 남반구 국가들이 정책 집행과 국제 협력을 통해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다양성협약 제18조에 따라 조성된 유네스코의 ‘국제 문화다양성 기금’(International Fund for Cultural Diversity, IFCD)이 특히 ‘남-남’ 및 ‘북-남-남’ 간의 협력을 증진하는 사업에 집중 투입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손발 묶인 남반구 예술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반구의 예술가와 문화 종사자들은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 발달과 함께 급속히 팽창 중인 글로벌 문화 시장에서 경쟁을 해 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선진국 문화 종사자들과의 경쟁은 커녕, 해당 시장에 참여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지난해 발간한 문화다양성협약 글로벌 리포트인 『문화정책의 (재)구성』(Re‒Shaping Cultural Policies)의 제5장에 따르면 남반구의 예술가들이 진출을 희망하는 주요 시장은 주로 북반구 국가들에 있지만, 현재의 안보 환경 속에서 남반구의 예술가들이 해당 목적지로 접근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몇 년간 난민 유입 문제와 관련해 선진국들이 여러 제한 조치들을 시행하고 (특히 남반구 국가들로부터의) 이주 자체를 경제적 위협으로 보는 시각이 퍼지면서, 남반구의 예술가들과 문화 종사자들의 이동에 직간접적인 제약이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는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시리아의 극작가 모하마드 알 아타르(Mohammad Al Attar)가 쓰고 오마르 아부 사다(Omar Abu Saada)가 연출한 연극 「내가 기다리는 동안」(While I Was Waiting)이 겪은 어려움을 들었다.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의 시민들이 겪는 혼란상을 담은 이 연극은 2016-2017년에 유럽, 미국, 일본에서 성황리에 공연되며 큰 주목을 받았는데, 극단은 주로 시리아인들로 구성된 단원들의 비자 발급 문제로 공연 리허설 장소가 터키에서 프랑스로 바뀌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가, 해당 국가 고위층의 개입으로 겨우 이를 해결한 바 있다.
보고서는 또 북반구와 남반구의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한 평균 국가의 수가 각각 156개와 75개로 거의 두 배나 차이가 난다는 조사 결과를 제시하며, “수많은 이동성 제약, 특히 예술가와 문화 전문가에게 부과되는 비자 요건은 정말로 역설적이다”라고 지적한다. 낙후된 교통 인프라 때문에 남반구의 예술가와 문화 종사자들이 부담하는 항공료나 화물 운송료 등이 북반구 파트너들에 비해 훨씬 비쌈에도, 문화다양성협약에 따라 예술가와 문화 종사자의 이동성을 증진시키는 우대 정책 및 조치가 오히려 북반구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도 역설적이다. 보고서는 ‘이동성 기금’의 지원 대상 국가 중 66%가 북반구에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북반구의 예술가들이 남반구의 예술가들보다 여행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훨씬 많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주거와 체제 비용 등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역시 절대 다수인 87%가 북반구에 위치한다.
섬광이 아닌, 물결로서의 문화다양성
물론 남반구 예술가들의 이동성 보장과 지원에 관한 문제가 남반구 문화 산업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나아가 문화다양성협약을 이행하는 과정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보고서를 통해 유네스코는 이 문제 외에도 ▲ 문화 상품과 서비스의 균형적인 흐름이 증대되도록 하고 ▲ 지속가능한 문화거버넌스 체계를 지원하고 ▲ 지속가능한 발전 체제로 문화를 통합하고 ▲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증진하는 등의 네 가지 목표를 제시하며, 이러한 목표가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에 연계되어 새로운 로드맵의 요소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다양성협약의 핵심이 각국의 문화 생산을 보호하고 증진하며 국가 간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것이라 볼 때, 이 네 가지 목표가 특히 남반구 국가들에서 효과적으로 달성되어야만 비로소 협약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를 서방 선진 국가들이 선점하면서, 아직 산업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국가들의 문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른 속도로 잠식되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역대 어느 때보다 많은 전 세계의 영화팬들은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고 있고, 인도 시골 농부가 드레이크의 노래에 맞춰 ‘키키 댄스’를 추는 장면은 순식간에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지며 그 농부의 삶을 바꿔놓기도 했다.
동남아의 수많은 ‘커버 댄스 그룹’들은 지역 내에서, 나아가 전 세계에서 또다른 BTS의 탄생을 꿈꾸며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다. 유네스코는 남반구의 이러한 재능들과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다만 반짝하는 섬광으로 그치지 않고, 되돌릴 수 없는 물결이 되어 전 세계에 고루 가 닿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더 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새로 형성되는 시장에 참여하고, 국가의 적절한 정책적 지원 속에서 정의로운 방법으로 재능을 펼치게 될 때, 인류는 문자 그대로의 ‘다양성’으로 새 천년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