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는 전부터 나에게 이상한 존재였다.
나는 제주도 협재 출신 아버지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매일 아버지께 제주도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 어린 마음속에 제주도에 대한 이미지를 점점 키워가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형상화하기 어려운 존재가 해녀였다. ‘여성이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포획한다?’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방법으로 잡는지 어린 시절에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왜 그렇게 힘겨운 일을 여성이 하는거지?’라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매년 여름 방학이면 치바현의 ‘우치보우소우’라고 하는 곳에 해수욕을 하러 가곤 했다. 그곳에서 처음 해녀라는 존재와 조우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해녀의 대기소로 가서, “오늘 맛있는 것은 무엇이죠?”라고 물으며 여러 가지 해산물을 구입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 그 해산물을 먹어보면 역시나 너무도 맛있는 그 맛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해녀는 여름방학 특별한 때, 맛있는 것을 나에게 선물해주는 여름의 산타클로스 같아 보였다. 그때는 내가 아직 어렸으니까.
내가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 시기는 1998년 5월 말, 내 나이 38세 때였다. 서울로 가기 전에 제주도에 먼저 들렀다. 머릿속에서 늘 그려왔던 아버지의 고향을 빨리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관광 초보자인 우리 일행은 중문 호텔에 숙박했다. 그 아름다운 해변에서 제주도 해녀와의 첫 조우가 이뤄졌다. 제주해녀는 내가 그간 상상해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쾌활하면서도 다소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날씨는 좋았고, 해산물은 맛있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고향 첫 방문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이후, 음악활동을 통해 몇 번이나 제주를 찾게 되었다. 그러던 2013년의 어느 날, 제주의 ‘해녀박물관’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해녀의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의뢰였다. 이제껏 해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해녀의 노래가 사실은 일본노래라는 이야기와 함께…. 노래를 들어보니, 가사는 우리 말로 되어 있었지만, 선율은 나도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 군국시대의 행진곡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작곡 의뢰를 수락했다.
작곡에 앞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가 만들 새로운 해녀의 노래는 삶의 고통이나 비운의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물질을 하는 매력적인 해녀와 제주도의 정경이 오버랩되는 ‘따뜻한 것’으로 하고 싶었다.
이렇게 완성된 곡은 나와 제주도립교향악단 등과 더불어 실제 해녀 25명에 의해 야외 특설무대에서 초연되었고, 도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이른바 전대미문의 공연이 되었다. 그 공연의 타이틀이었던 「Jeju Fantasy」는 그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열렸고, 지금은 「제주뮤직페스티벌」(JMF)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의 여름 음악축제로 자리잡았다.
해녀의 노래는 2014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나의 콘서트 <양방언 Evolution 2014>에서도 소개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내 콘서트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평화예술홍보대사로 위촉된 이후, 2015년 11월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유네스코 70주년 기념공연, 12월 통영에서의 교육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콘서트 등으로 유네스코와의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던 중에, 이번에 우리 제주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고 낭보를 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이루어지니 기쁨과 더불어 불가사의한 기분마저 든다.
작년에 개봉된 고희영 감독의 해녀 다큐멘터리 영화 <물숨>에는 음악감독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여러분께도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고단한 위험한 해녀의 삶이지만, (영화속에서) 해녀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의 바다가 있고, 해녀이기 때문에 행복하다. 다음 생에 태어나더라도 해녀가 되고 싶다”라고.
나는 제주해녀가 자랑스럽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나는 <해녀의 노래>를 연주할 것이며, 그녀들과 이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이다.
제주해녀 여러분, 사랑합니다
양방언 크로스오버 뮤지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평화예술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