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적인 사회 건설이 극단주의와 폭력, 그리고 편견과 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선결조건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여러 관련 단체들과 더불어 유네스코는 포용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와 연구에 참여하거나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찬성 혹은 반대에 앞서 그것을 철저히 살펴보고 가능한 다양한 선택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특히 ‘아이디어의 실험실’임을 자처해 온 유네스코의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소득 격차와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세계 각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피해자 소득 보전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동시에 임시방편이 아닌, 계층 간 격차를 줄이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항구적인 정책으로서의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해당 이슈의 정치적·이념적 폭발력이 너무 크기 때문인지, 그 뜨거운 관심에 비해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는 아직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국민에게 일정 금액의 현금을 제공해 기본적인 삶의 수준을 유지하게 한다’는 기본소득의 개념은 대단히 직관적이며 명료하다. 이 때문에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문가들은 이 정책의 시행이 연쇄적으로 불러 일으킬 영향은 매우 복잡하며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세계은행이 발간한 보고서 「Exploring Universal Basic Income」(보편적 기본소득 탐구)에서 미갈 럿카우스키(Michal Rutkowski) 세계은행 사회보장 및 고용 글로벌 이행 담당 수석도 “기본소득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며 깊은 성찰과 논의 없이 해당 의제에 대한 결론부터 내리려는 태도를 경계한 바 있다. “기본소득 정책이 국가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시행된 사례가 없고 현재까지의 논의는 소규모 실험과 정보를 취합한 견해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럿카우스키 수석은 또 “기본소득 정책을 도입하는지 안 하는지, 한다면 왜,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 복잡한 난제 때문에 이같은 보고서가 기획됐다”면서 “이 연구의 결과를 단지 찬성, 혹은 반대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도 덧붙였다.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 및 논의가 찬반보다는 “프레임워크 형성, 즉 생각의 구조화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역시 유네스코 포용정책연구소(UNESCO Inclusive Policy Lab)를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포용정책연구소는 지난 3월 26일에 내놓은 정책자료 「Basic Income — On Policy and Data」(기본소득 — 정책과 데이터에 관해)에서 “이 새로운 이슈에 대한 양극화된 관점을 완화하고 보다 지적인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분야와 배경의 전문가들로부터 분석과 데이터를 모았다”고 밝히며, 지금 현재 기본소득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이 사회가 ‘기본’으로 제공해야 할 것들이 궁극적으로 포용적이며 평등한 세상 만들기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스템의 보완책인가, 새로운 시스템인가
사실 기본소득의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2014년부터 올해까지 유네스코 사회인문학단장을 역임했고 현재 유네스코 포용정책연구소에 전문가로 참여하고 있는 존 크라울리(John Crowley) 박사는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이하 기본소득으로 통일)의 아이디어는 그간 (없었던 게 아니라) 정책의 주변부에 묻혀있었을 뿐”이라며, 그것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다양한 국가에서 마련한 대책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각국이 내놓은 소득보전 정책들은 큰 틀에서 기본소득의 개념을 활용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국가가 현금 혹은 서비스를 국민에게 보편적, 혹은 선별적으로 직접 제공하는 이러한 개념은 기계와 프로그램이 사람의 일을 점점 대체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여러 나라의 사회보장정책의 일부로서 녹아들어가 있다. 그것이 최저생계비나 실업수당의 형태든 보편적 기초교육 제공의 형태든,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은 이미 높아지는 실업률과 사회적 불평등 양상을 경감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하거나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크라울리 박사는 현 시점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현재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개량(tweak)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포용적이며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시민권의 재발견’(reinvention of citizenship)의 측면에서 더욱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10월 크라울리 박사와 함께 포용정책연구소 팟캐스트를 진행한 요아나 마리네스쿠(Ioana Marinescu) 전미경제연구소(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연구원은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를 “단순한 소득보장을 넘어 새로운 개념의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시민들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게 해 줄 바탕으로서 기본소득을 바라봐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마리네스쿠 연구원은 “정책적 측면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면서 “(시민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게 해 줄) 완전한 형태의 기본소득 보장이 한쪽 끝에 있다면 다른 쪽 끝에는 최소한의 소득과 서비스만 제공하자는 아이디어가 있으며, 그 사이에 어느 정도의 소득과 어떠한 서비스를 ‘기본’으로 포함해야 할지에 관한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이 많은 선택지 중 우선순위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와 더 많은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참여를 통한 컨센서스 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보편적인 것들의 최대치
기본소득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사회 시스템 안에는 수많은 ‘보편성’과 ‘공공성’이 깃들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이미 전면적 혹은 선별적으로 공공의료와 교육 분야의 보편적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의 보편성을 더욱 확장하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사회에서는 수많은 공격과 견제, 그리고 갑론을박이 발생하곤 했지만, 그럼에도 보편적 서비스 자체의 불가피성에 대한 공감대는 오늘날 더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일부 전문가는 이제 이런 질문을 한번 제기해 볼 때도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적절한 교육과 의료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라면, 영양분 섭취와 따뜻한 집, 자녀 육아, 나아가 적절한 교통수단과 정보는 그만큼 보편적일 필요가 없는 것일까? 보편적 서비스의 개념을 의료와 교육 분야 너머로까지 더욱 확장할 수는 없을까?
이안 고흐(Ian Gough) 영국 바스대학 사회정책 석좌교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넘어 보다 확장된 ‘기본서비스’(Universal Basic Service)의 도입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흐 교수는 기본소득의 핵심 개념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재분배를 통한 불평등 해소에 있다면, 현금을 지급해 필요한 서비스를 구입하게 하는 것보다는 모든 계층에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편이 더욱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예컨대 아래 [표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2000년대 후반 27개 OECD국가에서 각 소득 계층이 가처분소득 중 교육, 의료, 육아, 부모부양 등의 분야에 지출한 금액의 비중은 소득이 낮을수록 훨씬 컸다. 소득 하위 20% 계층이 해당 서비스 이용에 가처분소득의 75.8%를 쓴 반면, 상위 20% 계층은 전체 가처분소득의 13.7%만 소비했다. 따라서 이들 서비스 분야를 보편적으로 제공해 주는 것은 자동적으로 하위 소득 계층에 큰 혜택을 주게 될 것이며, 기본소득이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유인 효과(disincentive effect; 고용, 노동 등에 대한 의욕 감소)도 방지할 수 있다는 게 고흐 교수의 주장이다.
‘기본’의 색깔은 녹색으로
한편, 기본소득이 됐든 기본서비스가 됐든 국가가 개인의 소득이나 개인이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겠다고 나서는 모든 아이디어가 대개 즉각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비용을 어떻게 다 마련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가장 먼저, 그리고 흔하게 나올 수 있는 반론인 만큼 그 답을 추산해 본 연구는 이미 적지 않게 나와 있다. 기본소득 시행을 약속하는 정치인들도 저마다 대책과 구체적인 ‘숫자’는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수치임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에 불과하다. 게다가 앞서 살펴보았듯 기본소득을 시스템의 보완이 아닌 새로운 시스템의 마련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 추정치는 더욱 신뢰성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단단한 논리와 증거로 무장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마크 폴(Mark Paul) 플로리다 뉴칼리지 경제환경학 조교수가 소개하는 ‘녹색기본소득’(Green Universal Basic Income)은 점점 더 많은 인류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요즘 더욱 솔깃하게 들리는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책이다. 폴 교수에 따르면 녹색기본소득은 지금 인류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인 탄소배출량 경감과 불평등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는 기후위기와 관련해 지금까지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는 탄소세(carbon tax)와 경제학자 제임스 보이스(James Boyce)가 탄소세의 공공 환원을 위해 주장한 탄소배당금(carbon price-and-devidend)을 기본소득과 하나로 묶은 것으로, 세계 모든 국가에 탄소 배출량에 따른 세금을 부과한 뒤 이를 다시 전 인류에게 똑같이 기본소득으로 나눠주자는 주장이다. 결국 탄소세는 탄소를 훨씬 많이 배출하는 개발도상국 및 선진국 국민이 주로 부담하게 되고, 현재의 기후 위기에 거의 책임이 없으면서도 기후 위기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최빈국 국민들은 탄소세에 따른 추가 지출 없이 누구나 일정한 소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2011년에 나온 전미경제연구소의 한 연구는 이같은 정책이 시행될 때 계층별 소득 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평균 3-6퍼센트 정도 줄어들 수 있으며, 특히 빈곤선(poverty line) 아래에 속한 인구수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게다가 탄소세는 물가와 서비스 가격을 상승시켜 (주로 부자 국가의) 소비자에게 필연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데, 탄소배당으로 평등하게 분배되는 소득은 이러한 부담을 상쇄시키는 역할도 하며, 이러한 정책은 실제로도 캐나다와 스위스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다. 물론 선진국 국내에서 시행되는 이러한 탄소배당 정책은 탄소경감대책의 일환으로 활용되는 것이지만, 폴 교수는 이를 전 지구적 단위로 넓힌다면 특히 가난으로 고통받는 개발도상국 이하 국민들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기본소득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찬성과 반대의 골짜기를 넘어
기본소득과 관련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주장들은 저마다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나름의 한계와 아직 불확실한 부분도 여전히 적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제안들을 들여다보는 이들에게 유네스코 포용정책연구소가 공통적으로 요청하는 바는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가 재원 조달과 고용, 인플레이션 등과 관련한 파편화된 연구를 넘어 보다 시스템적인 차원,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의제와도 연관된 분석과 지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는 기본소득이 다방면의 문제를 홀로 해결할 ‘게임체인저’라는 환상을 버리고, 대신 그것이 우리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다양한 의제의 한 부분으로서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다 면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후위기를 한방에 해결할 만병통치약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 코로나19 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는 불평등과 뿌리깊은 불공정을 단번에 해결할 정책이란 세상에 없다. 빈틈없이 시행될 수 있다면 기본소득은 분명 꽤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이 역시 불평등, 시민권, 젠더, 정치참여와 같은 사회 전반의 의제를 포함한 시스템 차원의 접근일 때 가능한 이야기다. 따라서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간단한 개념의 행간에 있는 여러 함의들을 읽어내고 이를 구체화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찬반으로 나눠진 기본소득의 골짜기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삶과 인권을 고양하는 세상으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unesco.org “Basic Income — Think Data then Policy”(2021), “Decipher the Promises of Basic Income”(2020), “Move the Debate from Universal Basic Income to Universal Basic Services”(2021), “Greening the Basic Income”(2021)
· World Bank 『Exploring Universal Basic Income』(2020)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