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속 목소리의 역할
구체적인 이미지를 볼 수 없고 ‘들을 수만 있다’는 것은 정말 라디오만의 강점이 될 수 있을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폼페우파브라대학교(UPF)의 커뮤니케이션 교수이자 미디어심리학연구소장인 엠마 로데로(Emma Rodero)가 『유네스코 꾸리에』에 실은 ‘라디오의 목소리’에 대한 분석을 편집해 소개한다.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일련의 감정, 기분, 정신적 이미지를 촉발시키는 경험이다. 청취자의 마음 속에서 창조된 이러한 정신적 이미지들이 생생하고 가짓수가 많을수록 청취자의 인지적 처리과정도 풍부해질 것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듣는 이의 마음에 일종의 청각적 각인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라디오를 들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듣고 있는 내용에 몰두한다. 이러한 연결과 몰입은 심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라디오 청취자는 라디오 진행자와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이야기에 참여함으로써 행복감을 느낀다. 그렇게 하면서 청취자는 진행자의 여러 특징을 유추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청취자는 진행자의 나이, 성별, 키, 몸무게 같은 특징—마지막 두 가지 특징은 감지하기 더 어렵기는 하지만—들을 인식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마음속 이미지의 형성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목소리의 특징에 기초해 목소리 주인공의 구체적인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2013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한 그룹의 참가자들은 뉴스를 읽어주는 몇 개의 라디오 음성을 들었다. 다른 그룹의 참가자들은 목소리 주인공들의 사진을 먼저 본 뒤 똑같은 내용을 들었는데, 이 그룹 참가자의 73%는 자신들이 본 이미지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고 응답했다. 두 그룹의 참가자들이 말하는 이의 모습을 생각해내는 정도도 달랐다. 목소리만 들은 그룹에서는 39%가 말하는 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했지만, 두 번째 그룹에서는 18.5%만 그랬다. 말하는 이의 목소리만 들은 그룹은 내용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덕분에 이 그룹의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을 더 많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듣는 이는 말하는 이의 목소리의 특징에 의존해 머릿속에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과정은 영화 같은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고정관념적 연상작용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영화 속 악당은 항상 거칠고 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례의 영향을 받아 듣는 이는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서 이미지를 유추한다. 이는 곧 사람들이 라디오에서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 모두가 비슷한 신체적 특성을 상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고음의 가는 목소리를 들으면 키가 작은 사람일 거라고 상상하고, 관능적이고 나즈막한 목소리를 들으면 매력적인 사람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연상작용이 늘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청취자는 라디오 진행자를 실제로 봤을 때 자신의 마음 속 이미지와 다른 모습에 놀라곤 한다.
우리가 목소리에서 유추하는 특성은 주로 특정한 발성적 특징과 관련이 있다. 발성적 특징 가운데에서도 억양이나 높낮이는 사람들의 인식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를 테면, 높은 음조의 목소리는 보통 행복감, 흥분, 기쁨 같은 긍정적인 기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동시에 경계심, 두려움, 초조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깊은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
우리가 한 연구에 따르면 청취자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높을 때 긴장감, 거리감, 차가움, 약함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깊은 목소리는 강하고 키가 큰 체격과 짙은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청취자의 목소리 선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신뢰, 성숙, 우월함의 느낌을 전하는 낮은 목소리였다. 라디오 뉴스에 대한 연구에서도 낮은 목소리는 더 듣기 좋을 뿐만 아니라 “더 설득력 있고, 차분하며, 신뢰감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학자 클라우스 R. 셰러(Klaus R. Scherer)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청취자가 진행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 진행자의 성격, 기분,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비율은 65%라고 한다. 목소리는 말하는 이의 성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매우 빠르게 말하는 사람은 보통 긴장했거나 외향적인 사람으로 인식되는 반면, 희미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수줍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라디오 진행자도 일정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사용해 감정과 의도를 전달한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은 너무 단조로워서도, 지나치게 변화무쌍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억양으로 계속 말하면 듣는 사람이 집중하기가 어렵다. 반대로 일정 간격으로 말끝마다 억양을 높이는 ‘업토크’(uptalk)도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내용과 관련이 없거나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에는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두 극단 대신에 라디오 진행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적절한 변주(變奏)를 가하는 것이다. 즉, 청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높은 음조로 문장을 시작한 다음, 중요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낮은 음조로 끝을 낸다. 많은 훈련과 연습을 거친 진행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청취자가 마음 속에 이미지와 인상과 감정을 적절히 그려내도록 돕는다. 따라서 청취자가 라디오 앞에서 할 일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자의 따뜻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면서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뿐이다.
번역 원문 출처
한국어판 『유네스코 꾸리에』 2020년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