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와 여러 단체, 그리고 여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전 세계 과학기술분야 최일선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남과 여의 온전한 ‘양쪽 날개’로 날아오르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지난 5월 말 발간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는 21세기에도 다양한 편견과 유리천장 앞에서 좌절하는 여성 과학자들의 수가 적지 않음을 지적하며, 여성들이 과학 분야에서 공정하게 활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때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인류의 여정 역시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지금 코로나19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백신 접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이다.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세계 곳곳에서 다시 확진자가 늘어나는 와중에도 전문가들은 ‘백신만이 희망’이라며 백신 접종에 적극적으로 임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몇몇 사람들과 매체가 발신하는 수많은 허위정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드러난 백신 부작용 사례들은 ‘백신이 안전하다’는 다수의 전문가와 관계 당국의 설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독일의 국제방송 『독일의 소리』(Deutsche Welle)는 지난 6월 ‘여성 백신 접종자의 부작용 발생 비율이 남성에 비해 더 높다’는 내용의 기사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스위스에서는 부작용 보고 건수의 68.7%가 여성이었고 미국에서는 79.1%, 노르웨이에서는 83%까지 그 비율이 높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는 과학적으로 충분히 신뢰할 만한 표본을 분석한 게 아니며, 따라서 코로나19 백신이 ‘여성에게 부작용이 더 크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사는 강조했다. 백신의 효과나 부작용 양상이 생물학적 성별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고통을 억누르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아 온 남성들이 부작용에 대한 보고 자체를 꺼리는 경향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기사는 백신뿐만 아니라 대다수 의약품의 개발 및 임상시험 과정에서 ‘남성이 아닌 성’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가 충분히 진행되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그리고 제품 개발과 시험 과정에서 ‘여성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에 21세기의 과학계가 진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 부재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진보
실제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실린 ‘코로나19 임상 연구에서 성과 젠더의 미흡한 반영’ 논문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올 1월까지 미 국립의학도서관(NLM) 산하 웹사이트에 등록된 4420건의 코로나19 관련 연구 중에서 성(젠더)적 차이를 주요 변인 중 하나로 삼아 실험을 진행한 연구는 4%(178건)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코로나19 백신이나 치료제가 남녀에게 같은 방식으로 사용됨에도, 이를 실험실에서 개발하는 과정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한시가 급한 코로나19 상황에 따른 예외적 현상은 아니었을까. 존스 홉킨스 공중 보건 블룸버그 스쿨의 로즈마리 모건(Rosemary Morgan) 연구원은 “의·약학 연구에서 성과 젠더에 따른 분석이 빠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며, “미국에서 임상 시험에 반드시 여성을 포함시키도록 한 것도 1993년에 와서였다”고 말했다. 미 노스웨스턴대 여성건강연구소의 테레사 우드러프(Teresa K. Woodruff) 소장 역시 지난 201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기사에서 “(인간 신체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변수인 성별은 시간이나 온도, 약물 투여량 등의 여타 변수에 비해 실험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지 못했고, 이러한 경향은 심지어 여성 질환 대상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토로한 바 있다. 다만 해당 기사뿐만 아니라 인터뷰에 응한 연구자들은 남성 중심의 과학계가 연구개발 과정에서 고의로 여성에 대한 데이터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며, 이는 1858년에 ‘평균적인 신체의 남성’을 대상으로 연구·발간된 현대 해부학의 바이블인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에서부터 이어져 온 “다분히 관습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험용 쥐에서부터 배양용 세포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연구와 실험에 사용되는 샘플의 변수가 남성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은 해당 제품들이 상용화된 이후 여성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사전에 걸러내기 어렵게 만든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성의 사례를 기반으로 정리된 심혈관질환 증상이 여성에게서는 잘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2000년대 들어 밝혀지기 전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병원에서 ‘이상없음’을 진단받고 위험에 노출된 사례는 의학계에서 유명한 일화며, 시판중인 일부 수면 유도 약물의 여성 상대 적정 투여량이 남성의 절반 수준이라는 사실이 여성들의 부작용 사례 보고 이후에야 밝혀져 뒤늦게 이를 수정한 사례도 있다. 이에 2014년 미 국립보건원(NIH)은 NIH의 지원을 받는 모든 연구들이 세포에서부터 실험용 동물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차이를 반드시 분석하도록 규정을 바꾸기도 했다.
과학 혁신을 넘어 미래 생존의 문제
이와 같은 사례는 과학계에서 충분한 수의 여성이 중요한 자리에서 활약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문제 중 하나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현장에서 여성이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새로운 관점과 각도에서 당면한 문제를 바라볼 소중한 ‘눈’ 한 쪽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유네스코를 비롯한 여러 관련 단체들은 더 많은 여성들, 나아가 더 다양한 젠더를 가진 구성원들이 과학계에 진출해 경력을 쌓아 나가도록 돕는 것이 과학 발전뿐만 아니라 그 발전의 혜택을 전 인류가 평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유네스코도 지난 5월에 발간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에서 ‘현명한 결과를 얻기 위해 보다 포용적인 디지털 혁명을’이라는 제목의 장을 할애해 과학계의 젠더 문제를 분석하고,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matics; 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미래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인공지능(AI) 등의 최신 과학 분야에 여성들이 더 많이 진출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네스코 과학보고서』는 매 5년마다 전 세계 과학 거버넌스의 트렌드와 발전 현황을 분석하는 보고서로, 이번에는 특히 ‘더 현명한 발전을 위한 시간과의 싸움’(The Race against Time for Smarter Development)이라는 부제를 달고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 및 4차산업혁명에 임하는 과학계의 당면 과제를 집중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과학 분야 학부 및 석사 과정에서 여성의 숫자는 남성과 평등 상태(45-55%)를 이루고 있고, 박사 과정에서도 여성이 44%에 달해 적어도 수적인 측면에서 과학도의 꿈을 키워 나가는 여성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렇게 해당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여성들이 향후 안정적으로 경력을 쌓아나가는 데 여전히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고서는 전 세계 107개국의 데이터를 토대로 “2018년 기준 전 세계 직업 연구자의 33.3%가 여성이며 이는 2013년의 28.4%에 비해 나아진 수치”라면서도 “여성들이 박사 과정과 조교수, 책임 연구자 및 정교수로 이어지는 경력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젠더 격차가 벌어진다”고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연구자들은 남성 동료에 비해 연구 예산 수령액도 부족한 경향을 보였으며, 전 세계 연구자의 3분의 1이 여성임에도 각국의 국립 과학 학회에서 여성의 비율은 12%에 그칠 정도로 여성이 과소대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분야인 컴퓨터, 정보기술(IT), 수학, 물리학, 공학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가 더욱 부족한 상태임이 대다수의 국가에서 나타났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현상은 4차 산업혁명이 기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부터 일자리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서 광범위한 변화를 불러 일으킬 것을 감안할 때 우려스러운 부분이라고 경고했다.
2015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여성은 전체 직장인의 57%를 차지하지만, 컴퓨터 관련 직종에서 그 비율은 25%에 머물렀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7년 사이 전 세계의 AI기술 관련 종사자 수는 190%가 증가한 반면 해당 직종 내 여성의 비율은 22%에 그쳤으며, 이러한 현상은 AI 관련 일자리 비중이 가장 높은 상위 30개 국가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AI나 로봇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관련 일자리가 한 개 늘어날 때마다 줄어드는 일자리 수가 남성이 3개, 여성이 4개라는 유네스코의 분석을 참고하면, 최신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키우는 일은 그저 과학의 균형잡힌 발전뿐만 아니라 미래 여성들의 경제력, 나아가 인권 및 생존권과도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평등’의 진짜 의미
사실 오늘날, 특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덧 적잖은 반발을 예상하고, 또 그것에 대한 합당한 대답을 준비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와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과학계의 성평등’, 나아가 ‘과학계의 다양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성평등 문제뿐만 아니라 최근 ‘인공지능 윤리 권고’나 ‘오픈사이언스 권고’ 등 급격히 발전하는 과학 분야에서 윤리적인 가이드라인을 채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유네스코는 이같은 평등과 공정이라는 의제들이 단순한 기계적 평등에 기반해 과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행복하고 지속가능한 과학 발전’을 이루기 위한 밑바탕이라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다양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의심, 그리고 끈질긴 분석과 관찰이야말로 오늘날 과학을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학문으로 만든 핵심 요소였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계에서 더욱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가 자유롭게 나오도록 만들자는 것은 미래를 향해 쾌속으로 질주하는 오늘날의 과학계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주장이다. 복잡계 내부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스캇 페이지(Scott Page) 미시간대 교수는 “더 많은 여성, 나아가 동성애자나 이민족, 장애인 등 더 많은 사회적 정체성이 (과학에) 참여하는 것은 창의력과 영감을 풍부하게 해 주고, 따라서 혁신의 가능성도 높여준다”고 말한다. 페이지 교수는 젠더적 관점에서 오늘날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첨단 과학 및 테크 산업이 내놓는 서비스나 제품들이 백인과 아시아계 남성 일색의 프로그래머들의 작업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그게 어때서?’라고 묻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단일한 구성원들이 스스로 아무리 사려깊게 프로그램을 짠다 해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젠더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게 페이지 교수의 주장이다. 『유네스코 과학 보고서』 역시 같은 시각에서 과학이 윤리적인 책임감을 끝까지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과학 영역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불합리한 명령이나 희롱에도 언제나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여성으로 프로그래밍된 초창기 스마트폰 비서들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유네스코뉴스』 2019년 7월호 참조), 여성이 침묵할 때 과학이 그 결과물에 남녀 모두의 요구를 평등하게 반영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있는 과학의 힘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지속가능발전을 달성하고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일자리를 비롯한 경제활동과 건강, 생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미래는 과학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유네스코가 과학이 반드시 ‘모두를 위한 과학’이어야만 한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인 1948년에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의 제27조 1항에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참여하고 예술을 향유하며 과학적 진보와 그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당연히 염색체와 피부색과 성적 취향에 상관 없는, 문자 그대로의 모든 사람일 것이다. 유네스코는 4차 산업혁명의 초입에 서 있는 과학계가 진정 모든 사람을 포용할 것이라는 그 오래된 약속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키기를 기다리고 있다.
[참고자료]
· UNESCO 『UNESCO Science Report: the Race against Time for Smarter Development』(2021)
· dw.com “COVID Vaccine Trials: Where Are the Women?”(2021)
· nationalgeographic.com “Why It’s Crucial to Get More Women into Science”(2014)
· nature.com “Lack of Consideration of Sex and Gender in COVID-19 Clinical Studies”(2021)
· unesco.org “UNESCO Research Shows Women Career Scientists Still Face Gender Bias”(2021), “Women a Minority in Industry 4.0 Fields”(2021)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