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전 제시 위한 유네스코 연구 2년을 돌아보며
외교부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기획한 연구 사업인 ‘변화의 시대, 한국의 유네스코 협력비전’(2018)과 ‘평화를 향한 유네스코의 역할’(2019)에 2년 연속 참여한 한경구 교수는 이들 연구를 통해 도출한 한국의 유네스코 비전을 ‘유네스코를 통해 인류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활동을 주도하는 국가가 된다’는 것으로 정리한다.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각 연구들의 진행 경과를 독자들께 소개한다.
참여 그 이상의 역할에 대한 고민
한국은 유네스코에서 매우 중요한 회원국이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 한국이 이제는 유네스코에서 상위 10위권의 정규 분담금을 내며 상위 5위권의 비정규 예산 공여국으로 성장했다. 또한 집행이사국에 진출하여 의장직을 수행하는가 하면, 정부간해양학위원회(IOC), 정부간생명윤리위원회(IGBC) 등 다양한 유네스코 기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위원회는 199개 유네스코 국가위원회 가운데 가장 규모도 크고 활동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국제협력과 후원개발 등을 통해 해외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수많은 우리의 유산이 세계유산, 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등으로 등재되어 있고,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의 7개 전 분야에 한국의 도시들이 가입해 있다. 한국은 또한 세종문해상과 직지상 등 유네스코의 여러 국제상을 지원하며,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APCEIU),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무형유산센터(ICHCAP) 등 카테고리2 센터 5개를 설립하고 2개를 준비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유네스코에서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의제를 설정하거나 논의를 선도하는 등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유네스코 활동은 대체로 ‘국가 이미지 제고’라는 상당히 폭넓은 목표를 추구하면서, 특정 계기나 기회를 포착했을 때만 관련 정부부처나 기관이 관심을 갖고 활동에 나서는 정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유네스코 관련 2건의 연구, 즉 ‘변화의 시대, 한국의 유네스코 협력비전’(2018)과 ‘평화를 향한 유네스코의 역할’(2019)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당 연구에 착수한 직접적인 계기는 2018년 3월 외교부가 다자관광문화협력과를 유네스코과로 개편한 것이라 하겠지만, 보다 큰 틀에서는 공공외교와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유네스코 관련 외교적 대응 능력 증대를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2007년에 1998년 주프랑스대사관에 통합되었던 주유네스코 대한민국대표부를 재설치하는 방안이 검토되면서였다. 이후 ‘유네스코와 한국: 한국의 유네스코 활용 전략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2011), ‘위기의 UNESCO, 어디로 갈 것인가’(2013) 등의 연구가 수행되었고, 2017년 12월에는 ‘2017 유네스코 전략포럼: 전환기 유네스코 전략 재정립’이 개최되기도 했다. 세계질서의 중대한 변화, 유네스코가 직면한 위기와 개혁의 요구, 미국의 유네스코 재탈퇴 및 이에 따른 중국의 비중 증대, 한국의 기여 및 역할에 대한 기대 등도 이러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조성했다.
유네스코의 중요한 멤버로서 고민해 본 한국의 비전
외교부의 지원으로 연구를 주도한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2018년 2월에 외부 전문가로 한경구(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조동준(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조한승(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윤영(중앙대 국제정치학과 교수), 류석진(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손혁상(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으로 연구진을 구성하였으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측에서는 연구책임자로 임현묵(교육본부장, 현 유네스코 아태국제이해교육원장), 그리고 공동연구자로 김지현(국제협력팀), 전진성(문화팀장), 조우진(개발협력본부장, 현 교육본부장)이 참여했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한국의 유네스코 전략 연구’라는 제목에 대해 평화를 지향하는 유네스코 활동과 관련하여 ‘전략’이라는 군사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서, 최종 보고서에는 ‘유네스코 협력 비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공동연구는 축적된 연구 성과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유네스코를 평화 등 가치를 추구하는 기구로 볼 것인지 개발 기구로 볼 것인지 ▲한국에게 유네스코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지 ▲한국의 비전과 역할은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의 입장에서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소위 유네스코의 정치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영리조직이 아닌 유네스코에 대한 평가와 거버넌스와 조직 개혁은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 ▲유네스코의 정통성과 효율성 문제를 글로벌 거버넌스의 문제로 이해하면 어떨지 등 다양하고 근본적인 물음들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공동연구진은 2018년 6월에 열린 제주포럼에서 중간발표회를 개최하고 피드백을 받았으며,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문화인류학회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도 공동연구자 일부가 참석해 활발한 토론을 했다. 논의를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 공동연구진은 같은해 8월 한국문화인류학회 유네스코 세션 발표자들과 함께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공동연구는 11월 13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한국의 전환기 유네스코 협력 비전 수립 포럼’이라는 형태로 또 한 차례의 발표와 전문가들의 토론을 거쳐 완성되었다.
평화를 지향하는 국제 지적 협력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의 유네스코 협력 비전에 관한 2018년 연구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2019년에는 다시 외교부의 지원으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유네스코의 평화 지향 국제 지적 협력(知的 協力) 활동 강화 방안’이라는 후속 연구를 기획하였다. 2018년에 참여했던 한경구, 조동준, 최동주 외에 유성상(서울대 교육학과), 성지은(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강인욱(경희대 사학과, 고고학), 김성해(대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가 외부연구진으로 참여하였으며,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임현묵, 조우진, 김지현이 참여하였다.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연구 제목은 국제지적협력 활동의 목적인 ‘평화를 향한 유네스코의 역할 연구’로 확정되었으며, 한경구가 총론을 담당한 외에는 유네스코의 기본 활동 영역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중요 주제를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유성상은 ‘유네스코 교육협력 활동의 성과와 새로운 접근’을, 성지은은 ‘평화를 위한 유네스코 국제과학협력활동의 성과와 과제’를, 강인욱은 ‘증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유네스코 실크로드 문화유산 사업의 진단과 대안’을, 김성해는 ‘진화하는 커뮤니케이션·정보 분과와 한국의 미래전략’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김지현은 ‘회원국의 유네스코 활동 비교조사’를, 조동준은 ‘평화 개념을 찾아가는 유네스코’를, 최동주는 ‘유네스코에 대한 기대와 한국의 기여 방향’을 각각 집필했다.
2019년의 공동연구 역시 6월에 제주포럼에서 중간발표를 할 기회를 가졌는데, 공동연구진 외에 장재복 공공외교대사가 개회사를 하고 루츠 묄러(Lutz Möller) 유네스코독일위원회 부사무총장이 발표자로 참여한 가운데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최종발표회는 같은해 12월 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평화를 향한 유네스코 포럼’에서 안호영 북한대학원대 총장(전 주미대사, 유네스코 ‘전략적 전환’ 고위급 검토그룹 위원)과 싱치(Xing Qu) 유네스코 부사무총장(도브 린치 유네스코 회원국관계부서 과장 대독)의 기조발제로 이루어진 ‘세션 1’을 비롯해 ‘세션2: 평화를 향한 유네스코의 도전과제’ 및 ‘세션3: 유네스코와 회원국 간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르 나바로(Alexandre Navarro) 유네스코프랑스위원회 사무총장과 제임스 브리지(James Bridge) 유네스코영국위원회 사무총장이 공동연구진과 함께 발표자로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2년간의 연구를 정리하며
유네스코에 관한 두 차례의 의미 깊은 연구에서 필자가 총괄을 맡기는 하였으나, 사실 이러한 짧은 지면을 통해 연구 결과를 억지로 요약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더구나 이들 연구는 명료하고 일관된 결론이나 합의를 무리해서 도출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시각과 논의가 전개되면서 다소의 의견 차이는 있지만 넓은 의미의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해당 연구들의 총괄을 맡은 입장에서, 그 결과들을 정리하며 필자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소위 말하는 ‘유네스코의 위기적 상황’은 한국에게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만일 한국이 유네스코에서 단기적이며 협소한 의미의 국익을 추구하지 않고, 유네스코의 전문성과 지적 자율성의 확대, 인류공동체의 미래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의제의 설정과 프로그램의 개발, 그리고 이를 위해 한국의 국가 경제력에 상응하는 자원의 제공 등에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한국은 자연스럽게 인류라는 글로벌 커뮤니티 전체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글로벌 행위자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힘의 획득이란 장기적으로 한국의 국가 이미지가 뚜렷이 부각되고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이 증대되며 도덕적 힘과 발언권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유네스코에서 한국이 가장 잘할 수 있고 또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글로벌 커뮤니티 수준에서 지적·도덕적·실천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전쟁과 분단, 경제발전, 민주화를 경험했다. 또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르는 환경의 파괴와 함께 환경운동의 급속한 성장도 경험했다. 유사한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여러 나라와 공감하고 경험과 지혜를 나누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지정학적 위치와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 때문에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있다.
최근까지 한국의 유네스코 정책은 상황에 따라, 또한 기회에 대응하면서 국가를 홍보하고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연성권력(소프트파워)의 강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리지만, 무엇보다도 ‘인류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한국은 유네스코를 통해 노력하고 활동을 주도하는 국가가 된다’는 뚜렷한 비전과 장기적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2년간 진행된 각 연구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였음에도 평이하게 써졌다. 그리고 유네스코의 근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제는 유네스코에서 매우 중요한 회원국이 된 한국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다양하고 흥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연구 결과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쉽게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므로 유네스코와 한국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우리들의 연구결과물을 일독하시기를 바란다.
한경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문화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