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미래에 관한 전문가 회의
기록유산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야 할까? 지난 2월 28일,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미래에 관한 전문가 회의’를 준비하며 들었던 생각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지금 중요한 국면을 맞고 있다. 1992년에 시작된 이 사업을 통해 유네스코는 지난 27년 동안 인류의 소중한 정보, 지식, 기억을 담고 있는 기록물을 보호하고, 이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한편,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기록물 형태의 다양화 등 빠른 속도의 환경 변화에 기록유산사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록물 등재를 둘러싼 국가 간 갈등과 이해 충돌이 종종 불거지면서, 국제사회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본부도 세계기록유산 제도가 새로운 기록유산 환경에 올바르게 대응하고 기록유산을 둘러싼 갈등을 보다 체계적이고 투명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사업개혁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기여해온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유네스코 본부의 사업 개혁 시작에 발맞추어 전 세계 기록유산 전문가들과 함께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후 논의의 장을 확대해 유네스코 회원국과 함께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의의를 토론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올해 2월 말에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이번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번 회의는 시작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예상했던 인원의 두 배에 달하는 50개국 80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꽉 찬 회의실을 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미래에 대한 회원국들의 높은 관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회의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대한 유익하고 심도있는 논의가 진행됐다. 이번 회의의 중심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시작부터 발전 과정까지 전 과정을 함께해 온 여러 분야의 국제 전문가들이었다. 전 유네스코 집행이사회 의장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이었던 알리산드라 쿠민스(Alissandra Cummins)부터, 전 사업담당자이자 세계기록유산 등재소위원회 위원인 조이 스프링어(Joie Springer), 세계기록유산 일반지침 개정안의 저자인 레이 에드먼슨(Ray Edmondson), 등재소위원회현의 위원장인 얀 보스(Jan Bos)와 사업담당자인 팩슨 반다(Fackson Banda)까지, 그야말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패널을 맡았다.
전문가들은 발표 및 패널 토론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설립 당시 목적을 소개했다. 인상깊었던 부분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이 유엔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의 정신 및 문화 간 대화 촉진이라는 목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알리산드라 쿠민스 전 의장의 발언이었다. 기록물의 보존과 접근성 증진 위주의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더욱 본질적인 측면에서 사업의 철학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대한 논의인만큼 기록유산 등재를 둘러싼 갈등에 대한 논의도 빠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그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이 전문가 주도의 사업으로 효과적으로 운영되어 온 점을 강조하며, 이 사업이 지금까지 다양한 논점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이해관계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또한, 갈등 해소를 위한 절차가 이미 제도적으로 잘 정비되어 왔다는 점도 강조했다. 조이 스프링어 등재소위원회 위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서 드러난 회원국 간 갈등 해소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당사자 간 대화와 이해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등재를 그 대표적 사례로 소개했다.
전문가 발표와 패널 토의 후에는 질의응답 및 종합 토론이 이어졌다. 여기서 5개국 유네스코 대표부 대사와 국가위원회 사무총장들의 발언이 이어졌고, 리투아니아, 나이지리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총 5개국은 이번 회의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대한 정확한 내용과 사업의 주요 현안 및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발언했다. 또한 많은 참가자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전문가 중심의 사업으로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관한 종합적 검토를 신속히 마무리하여 사업을 정상화하고 세계기록유산 등재 업무도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면서 담당자로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점은, 그러한 갈등 속에서 이 사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장점과 기여가 퇴색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세계기록유산의 역사를 만들고 지켜온 전문가들의 발표와 회원국 간 유익한 토론을 지켜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잠재력과 이 사업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신뢰와 다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미래는 올 가을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이 사업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에 대해 여전히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번 회의가 그러한 논의 과정에 중요한 초석을 다지는 기회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또한 세계기록유산 사업이 앞으로도 모두가 원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지은 문화팀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