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질 때 우리 인류의 생존 역시 위협받는다는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벌의 멸종’이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들의 수분(受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식물계가 떠받치고 있는 지구 전체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위태로워진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는 벌이 대규모로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몇 년마다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직 그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진 못하고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벌들의 건강한 날갯짓 없이 지속가능한 우리의 내일을 상상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이다.
— 사라지는 벌들의 미스테리
2006년 가을, 북미 대륙 곳곳의 양봉업자와 농업 종사자들로부터 ‘집을 나간 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고가 다수 접수됐다. 어느날 꽃을 찾아 나간 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텅 빈 벌집에는 여왕벌과 애벌레만이 덩그러니 남았다는 내용이었다. 평균적으로 한 군집 내 전체 벌의 3분의 1, 많게는 90%까지 이렇게 사라져 버림으로써 해당 군집은 저장된 꿀의 양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결국 몰살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벌집 안팎에 벌의 사체조차 남지 않아 그 원인도 파악할 수 없는 이 현상에는 ‘군집 붕괴 현상’(Colony Collapse Disorder, CCD)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같은 사례가 보고되면서 ‘벌의 대멸종’이라는 자극적 제목과 함께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몇 년 안에 전 세계의 벌들을 집어삼켜버릴 것만 같았던 이 현상은 다행히 당장의 파국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미 환경보호청(EPA)은 홈페이지에서 “CCD 보고 건수는 상당히 줄었다”며 “월동 기간 동안 벌들이 소실되는 원인으로 CCD가 지목되는 비율이 2008년 전체의 60%에서 2013년 31.1%로 줄었다”는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벌이 대규모로 죽는 것이 모두 CCD 때문은 아니고 (중략) 일부 미디어가 살충제의 과다 사용으로 인한 집단 폐사 사례까지 CCD와 연관짓기도 한다”며 정확한 정보 전달과 습득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벌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끊이지 않는다. 『시사인』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올해 초까지 전남 해남과 경남 창녕의 양봉 농가를 중심으로 제주도와 강원 일부 지역에서까지 수많은 대규모 꿀벌 실종 사례가 보고됐다. 한국양봉협회는 지난 겨울 동안 전국에서 꿀벌 약 60억 마리가 사라졌다고 발표했고 일부는 그 원인으로 CCD를 지목하기도 했지만, 농촌진흥청은 “꿀벌응애(진드기)류, 말벌류에 의한 폐사와 이상 기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 원인 찾기보다 중요한 일
여러 기관과 전문가들이 말하는 대로 아직까지 CCD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EPA는 주요 후보 원인으로 ‘꿀벌 흑사병’으로도 불리는 꿀벌응애(진드기)나 각종 바이러스, 살충제 노출, 이동식 양봉에 따른 스트레스, 꿀 채집 장소 감소로 인한 영양 실조 등을 꼽는 가운데, 기후변화에서부터 무선 기기에서 발생하는 전자기파, 태양의 흑점 활동 변화로 인한 지구 자기장 교란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연구까지 있다. 사실 이 많은 가설들은 CCD 발생과는 상관 없이 벌의 생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지목되고 있었기에, 이들 중에서 이른 시일 내에 ‘진범’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에서는 마지막 CCD가 보고된 이후 5년 넘게 해당 사례가 나타나지 않아 후속 연구도 충분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 시점에서 단 한 가지의 ‘진짜 원인’을 찾는 것에 매달리기보다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는 수많은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이런 현상의 발생 건수가 증가하든 감소하든, 지금의 지구가 벌들에게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미 농무부(USDA) 벌 연구소의 곤충학자인 새뮤얼 램지(Samuel Ramsey) 박사는 지난 2020년 『NPR』(미국 공영 라디오)에 출연해 “CCD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은 이 세상 벌들의 건강이 정말 심각하게 좋지 않다는 사실”이라며 “그것은 전 세계에서 벌들이 받고 있는 굉장히 길고 다양한 형벌 목록의 마침표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CCD 연구 권위자인 데니스 판엔겔스도프(Dennis vanEngelsdorp) 미 메릴랜드대 곤충학과 부교수 역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그 병 자체가 아니라 면역 저하로 인해 걸리는 합병증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CCD와 같은) 질병은 벌들의 건강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나빠졌음을 알려주는 임계점과 같은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자루의 ‘스모킹 건’을 찾는 것보다, 이같은 현상을 유발할 수 있는 여러 원인들을 최대한 제거함으로써 무너져내리고 있는 생태계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뜻이다.
— 벌 없는 세상의 우리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벌의 실종과 건강 상태에 대해 사람들이 이처럼 많은 우려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지 달콤한 꿀 때문은 아니다. ‘동화책 주인공 급’의 친근하고 귀여운 외모 때문도 아니다. 벌의 경제적 가치를 설명하는 데 쓰이는 어마어마한 슷자들, 그리고 벌 절멸과 우리 인류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연결짓는 섬뜩한 가정들은 모두 ‘수분(受粉) 매개 생물’로서 벌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각각의 경작 단계 중에서 전 세계 농작물 생산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일 요소가 수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수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필요로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 이는 사실 당연한 말이다. 벌을 포함한 수분 매개 생물들은 전 세계 경작지의 35%에서 농작물의 수분에 도움을 주며, 생산량 기준 전 세계 주요 식량작물 중 87개 작물의 경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FAO는 수분 매개 생물의 활동으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농작물의 경제적 가치를 매년 약 2350-5770억 달러(한화 약 300-745조 원)로 추산한다. 특히 전 세계 농작물 생산의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기업형 경작지는 수분 또한 이동식 대규모 수분 작업에 의존하고 있고, 꿀벌은 여기서 그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수분 시즌이 되면 벌통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이 농장 저 농장을 옮겨다니며 양질의 ‘수분 서비스’를 제공하며, 특히 인간의 균형잡힌 식단에 필요한 작물들—견과류, 블루베리류, 사과 등—과 북미 축산농가에서 소의 주식으로 활용되는 알팔파(alfalfa) 경작에서 그 역할은 절대적이다. FAO에 따르면 아몬드 농사에서 수분은 비료나 물보다 더 중요하며, 사과 농사에서는 수분을 위해 1헥타르 당 2-3개의 벌집이 필요하다. 꽃술이 종 모양으로 생긴 꽃 깊숙이 숨어있는 블루베리의 수분 과정에서 호박벌(bumblebee)은 다른 어떤 생물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유엔은 매년 세계 벌의 날(5월 2일)을 소개하면서 “벌 없는 세상은 곧 다양한 음식이 없는 세상과 같은 말”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새뮤얼 램지 박사는 “분명히 밝혀두자면 (쌀이나 옥수수 등 인간의 주식으로 사용되는 식량 자원은 벌의 수분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벌이 사라지면 당장 인류가 멸망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 지적하면서도, 이러한 일이 생길 경우 “우리는 섭취 가능한 영양분의 다양성을 잃을뿐만 아니라 식량 산출량이 줄면서 그 가격도 훨씬 비싸질 것”이라 이아기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을 사람들은 바로 수십 억 명의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 국민들이다.
— ‘줄무늬’가 없어도 소중한 것들
지구의 생태계는 우리가 우려하는 것만큼 마냥 연약하지는 않다. 램지 박사의 설명대로 벌이 사라진다면 당장의 혼란은 적지 않겠지만, 놀라운 회복력과 적응성을 가진 자연은 벌 말고도 수분에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 벌의 날’을 제정한 유엔과 유엔식량농업기구, 그리고 여러 환경 관련 활동가들은 벌, 특히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꿀벌을 보호하는 것만이 이러한 활동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자연이 필요로 하는 수분 매개 생물들은 꿀벌 말고도 엄청나게 많으며,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꿀벌 외 벌의 종류만 해도 2만5000-3만 종에 달하고, 나방이나 파리, 딱정벌레, 일부 조류와 박쥐, 원숭이, 다람쥐 등도 어엿한 수분 매개 생물이다.
따라서 환경운동가들은 ‘꿀벌’이 관심을 독차지하고 대중들이 생태 보호에 대한 관심과 활동 범위를 여기에만 한정하지 않도록 보다 폭넓은 시각과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비영리 동물보호단체인 국립야생동물연맹(National Wildlife Federation)의 대변인이자 활동가인 데이비드 미제웨스키(David Mizejewski)는 “인간의 농업과 경제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꿀벌이지만, 단지 꿀벌을 지키는 것이 야생동물보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미제웨스키 대변인은 “이러한 (꿀벌을 활용한 대규모 양봉 및 수분)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며 매년 대규모 소실과 재번식을 반복하며 농작물의 대량생산을 떠받치고 있는 양봉은 보다 지속가능한 방식을 찾아야 하고, 동시에 꿀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토종 야생벌과 여타 생물들에게 닥친 위기에도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환경단체인 국제자연보전연맹(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IUCN)의 2015년 자료에 따르면 북미 토종 호박벌의 28%는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멸종 위기 상태에 놓여 있지만 이들에 대한 과학적이고 대중적인 조명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척추동물 보호를 위한 제시스 소사이어티’(Xerces Society for Invertebrate Conservation)의 스콧 블랙(Scott Black) 사무총장은 “(벌들을 지킨다면서 양봉에만 관심을 쏟는 것은) 야생 조류를 지키겠다고 집집마다 닭을 키우는 격”이라고까지 말하며, 전체 생태계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야말로 벌과 인류의 공존을 담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 회복과 균형, 그리고 공존을 위해
엄청나게 넓은 땅에서 단 한 종의 작물만을 대규모로 경작하면서 농약과 살충제를 끊임없이 살포하는 행태에 손을 쓰지 않은 채, 꿀벌들이 이러한 환경을 ‘잘 견딜 수 있는’ 방법만을 강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옳은 방향이 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시급히 찾아야 할 것은 생태계가 균형을 회복할 기회를 갖게 해 줄 공존의 방법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유네스코가 화장품 기업인 겔랑(Guerlain)과 파트너십을 맺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Biosphere Reserve)에서 진행하고 있는 ‘Women for Bees’(벌을 지키는 여성) 프로그램은 인간과 벌의 공존에 관한 유용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일방적인 개발이나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니라 인간과 생물권의 공존을 그 핵심 아이디어로 삼고 있는 생물권보전지역의 취지에 맞게, 벌을 지키는 여성 프로그램은 현지의 토착벌을 인간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활용하면서도 벌을 비롯한 생태계 내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방법을 지역 주민들에게 제시한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의 톤레삽(Tonle Sap) 생물권보전지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현지 여성들은 2종의 지역 토착벌을 활용한 지속가능한 양봉 기술을 배우고, 다양한 벌 관찰 프로그램이나 관련 활동을 구성해 에코투어를 진행할 수 있는 역량도 함께 기른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지구촌 전체의 벌과 수분 매개 생물들의 위기를 해결할 단 하나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인류의 식량 소비를 떠받치기 위해 대규모 기업적 양봉은 여전히 필요하고, 원인모를 질병을 견뎌낼 더 강하고 번성하는 꿀벌도 여전히 필요하다. 동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지구 곳곳에 자리잡고 살아 온 수분 매개 생물들의 생존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대안’뿐만이 아니라 ‘영감’이며, 전체 생태계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다. 톤레삽 호숫가의 그 여성들이 꿀을 채집하고 벌을 돌보면서 느끼는 바로 그 감각 말이다. 집을 떠난 벌들은 꿀을 찾기 위해 호숫가의 나무들을 여기저기 방문하며 수분을 돕고, 이들 나무의 열매와 씨앗은 매년 반복되는 홍수 때마다 동남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톤레삽 호수로 흘러들어가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이를 먹고 자란 물고기들은 메콩강 하류 지역에 사는 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필요로하는 동물 단백질의 70%를 공급한다. 이 웅장한 연결고리의 시작점에서 벌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서까래에 맺힌 벌집을 소중히 다뤄주는 주민들의 지식과 관심이었음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세상의 벌들은 내일도 꽃을 좇아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