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국제 성교육 가이드라인』 한글판 출간
한국의 성교육에 대한 요구조사를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성교육은 청소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급변하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 성인지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키우는 성교육이 뿌리내리는 데 도움을 줄 국제 성교육 가이드가 한글판으로 출간됐다.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열린 ‘2020 성평등 문화만들기 온라인 연설대전’에 참가한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은 연설로 우리 사회의 성교육 실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제가 학교를 다닌 11년, 참 긴 시간입니다. 그동안 저는 키가 50cm나 크고, 2차 성징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1년 동안의 학교 성교육은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교육’을 연설 주제로 고른 이유는, 성교육이 계속해서 동그란 트랙을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육이든 그것은 시대에 맞춰 바뀌어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성’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청소년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며 올바른 성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대로 된 성교육에 목말랐던 이 학생의 연설은 절절했다. 성교육의 내용은 예나 지금이나 생물학적 지식 전달에 머물러 있고, 성폭력예방교육도 ‘피해자 되지 않기’를 강조하는 데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성장과 발달에 따른 궁금증을 적절히 해결해 주고, 성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관계를 볼 줄 아는 인식의 확장을 위한 교육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이 학생은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 성교육의 목적과 방향을 다시 살피고, 청소년의 연령과 발달단계에 따라 필요한 지식, 태도, 기술을 가르치는 데 길잡이가 돼 줄 『2018 국제 성교육 가이드』(International Technical Guidance on Sexuality Education)가 한글판으로 출간됐다. 2009년 유네스코가 처음으로 펴낸 국제 성교육 가이드는 나라마다 다양한 성에 대한 가치 기준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청소년의 성 건강 및 복지에 위협이 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국제적 성교육 기준을 담은 성교육 안내서다. 10년만에 개정판으로 발간된 이번 가이드에 담긴 핵심 내용은 바로 ‘포괄적 성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 CSE)에 관한 것이다. 포괄적 성교육이란 청소년 복지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는 HIV, 성매개감염병(STIs), 의도하지 않은 임신, 젠더 기반 폭력(GBV) 및 젠더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청소년들이 안전하고 생산적이며 충만한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골자로 한다.
자신의 성적 지향과 관계를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조절하고 정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아동 및 청소년은 많지 않다. 성인기에 접어드는 많은 청소년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모순적·부정적이며 혼란스러운 메시지에 직면하고, 이는 부모나 교사를 포함한 성인들의 회피와 침묵으로 인해 종종 악화되곤 한다. 사회적인 규범은 여전히 섹슈얼리티 및 성 행동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방해하며, 성관계, 가족계획, 현대적 피임법 사용 등을 포함한 젠더 불평등적 요소를 제거해 나가는 데 미온적이다.
이 가이드는 학교 안팎에서 포괄적인 성교육 교재와 프로그램을 만드는 교육과 건강 및 기타 관련 당국을 지원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즉, 당사국 정부가 포괄적인 성교육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성교육에 대한 정책 기준을 세우고 관련 교육이 실질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추진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지침서다. 유네스코는 특히 이번 개정판에서 ▲젠더의 이해 ▲젠더기반폭력 ▲동의 ▲미디어·정보 리터러시 ▲정보통신기술의 안전한 사용 등에 대한 내용을 보완했다.
지난 2015년 교육부는 ‘국가수준의 성교육 표준안’을 만든 바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안은 성차별적이고 억압적이며 다양한 사회적 주체를 포용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성교육 현장은 여전히 교육방향에 있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소위 텔레그램 n번방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성착취 고리, 들불처럼 일어났던 학교내 위계위력에 의한 성차별과 성폭력 고발 스쿨미투, 끊이지 않는 고위권력층에 의한 성폭력 사건, 성소수자를 향한 공공장소에서의 혐오와 폭력이 난무한 그야말로 ‘성문화구조의 팬데믹 현상’을 볼 때, 인권이 존중되며 성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주체를 길러내는 일은 매우 시급하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번 가이드를 우리 교육에 접목하고 포괄적인 성교육을 이행하는 정책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이명화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