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있는 유·무형의 유산에 대해 우리는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떤 유산은 아는 만큼 바라보기 이전에 우리가 겪은 만큼 굳건한 기억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 기억이 균일하지 않거나 서로 상충될 때, 우리는 유산이 모두의 생각을 넉넉히 품어 안을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돔)’ 모습. 히로시마 원폭돔은 20세기 이후 갈등 및 분쟁 관련 기억으로 그 장소의 의미가 발생한 대표적 유산이다
유산을 향한 각각의 시선
언젠가 남과 북이 진심으로 두 손을 맞잡는 그날이 온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함께 꿈꿀 수 있을까. 1950년부터 이어져 온 불신과 충돌의 역사를 체험하거나 기억하고 있지 못한 미래세대에게는 똑같은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어떤 방법으로 전해줄 수 있을까. 아마도 교육과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남과 북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산을 활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유산을 통해 과거와 소통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며, 이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제도를 통해 전 세계 유·무형의 유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평화는 유산을 지정하고 보존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완성되거나 보장되지 않는다. 유산이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매개가 되려면 그것을 접한 모두의 마음에 같은 생각이 자리잡아야 한다. 그런데 전쟁이나 폭력 혹은 억압의 기억이 스며있는 유산이라면, 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와 건물이나 유물, 기록이나 증언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유산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각자가 가진 기억과 감정이 똑같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파주 임진각 철도종단점에 남아있는 파손된 증기기관차를 보면서 누군가는 평화 구축의 염원을 되새기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초래한 독재자에 대한 분노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유산은 언제나 한 가지 감정으로만 우리 마음을 두드리지 않으며 때로는 비극적 사건의 유산이 각자에게 남긴 의미가 극단적으로 달라서, 그것을 어떻게 미래세대에게 전달할지를 두고 새로운 갈등을 낳을 수도 있다.
오늘날 유산 전문가들은 특정 유산이 왜 중요하고 그것을 왜 보존해야 하는지를 결정, 혹은 합의하는 과정이 ‘단 한 개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과정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발간한 ‘유네스코 이슈 브리프’ 제5호 『평화와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세계유산 해석』에서 최재헌 건국대학교 세계유산학과 교수는 “단지 과거로부터 내려온 결과가 아니라 현재의 가치를 선택적으로 반영하고, 미래 세대에 그 선택적인 가치를 전승하는” 것을 유산화 과정(heritagefication)이라 설명하면서, 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기억과 정체성이 유산화 과정에 반영되지 못할 경우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파주 임진각에 전시돼 있는 6·25전쟁 시 파괴된 증기기관차.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과 남북 대치상황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기억의 취사선택을 둘러싼 갈등
각자가 유산에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고, 이것이 유산의 역사적 가치와는 별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개념화한 사람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다. 노라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130여 명의 역사가가 함께 수행한 연구를 모아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émoire)』를 펴내면서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이 깃들어 있어 그들의 집단 기억을 재구성해 낼 수 있는 대상을 ‘기억의 장소’라고 규정했다. ‘장소’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기억의 장소는 단지 건축물이나 유적지 같은 물리적 공간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국가(國歌)와 국기, 인물, 다양한 형태의 표현이나 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2018년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e)이 발간하는 『매거진 언어(Magazin Sprache)』는 이러한 노라의 연구에 대해 “기억의 장소들이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장소들이 집단기억이 결정화되는 지점이라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고 평가하며, 기억의 장소가 “과거는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 규명되고, 이해되고, 구축되면서 변화한다”는 역사학자 에티엔 프랑수아(Etienne François)와 하겐 슐체(Hagen Schulze)의 말과도 맞닿아 있다고 했다.
어떤 유산에 깃든 기억이 집단, 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되살리거나 강화하는 바탕이 되는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그러한 유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확인하는 ‘해석’의 과정 또한 더욱 다양해진다. 나아가 해석 간에 충돌과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세계유산제도를 통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보존하고 상호 이해와 평화 구축에 기여하고자 하는 유네스코가 갈등의 기억을 안고 있는 장소의 유산 등재를 조심스러워 하게 만든 배경 중 하나다. 최재헌 교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해석이 이해당사자에 따라 달라서 유산의 온전한 역사와 속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유산을 ‘갈등유산’이라 설명하면서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전쟁유산이나 갈등유산이 세계유산협약의 근본 정신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2018년 ‘양심의 장소 국제연대(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Sites of Conscience)’가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의 의뢰로 수행한 연구에서 밝혔듯, 지난 70년간 유산은 “기념비나 역사적 건축물이라는 협소한 정의에서 대중의 교육을 위해 과거의 증거를 보존·해석·제시하는 접근이라는 넓은 정의로 변화”해 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기억의 장소 혹은 갈등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건수도 증가했다. 여기에 세계유산이라는 인기있는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유산의 전체 역사와 다양한 해석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노력을 생략하거나 무시한 채 등재를 강행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지난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이다. 애초에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산업유산군’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해당 유산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승인받았던 일본은 이후 ‘군함도’를 비롯한 유산 지역 내 여러 곳에서 있었던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라는 한국의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유산의 명칭을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으로 바꾸면서 강제동원이 발생했던 시기를 슬쩍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산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되는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은 국제사회 앞에서 처음으로 강제 노역 사실을 인정하면서 한국 등의 수용을 이끌어내야만 했고, ‘유산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 수립’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겨우 등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 조건은 아직까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으며, 2021년에 열린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례적으로 일본에 강한 유감을 표하며 이행을 촉구하기도 했다.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왼편 야외에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가 전시돼 있다. 일제시대 경복궁을 굽어보며 우뚝 서있던 첨탑(사진 중앙)은 1995년 광복절에 가장 먼저 철거돼 지하 5m 깊이에 반매장함으로써 식민잔재의 극복과 청산을 강조하고 있다
갈등을 포용하는 유산 등재를 위해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처럼 유산의 해석을 두고 국가 간 갈등과 의견 충돌이 늘어나자 기억의 장소 및 갈등유산을 대상으로 유산 등재의 원칙을 재검토하기 위해 다각도의 연구를 추진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국제 NGO와 이코모스 등이 수행한 다섯 차례의 연구, 그리고 2021년 11월 세계유산협약국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작년 6월까지 9차례에 걸쳐 개최된 워킹그룹 논의 결과 ‘갈등기억유산 등재신청서 쟁점에 대한 합의 및 원칙’의 초안이 확정됐다. 이 초안은 오는 9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최될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검토할 예정으로, 이 자리에서 기억의 장소, 갈등유산 등의 개념을 세계유산 제도의 맥락 속에서 정리한 ‘갈등기억유산(Sites Associated with Memories of Recent Conflicts)’의 정의를 비롯해 주요 합의 내용이 확정된다면 세계유산위원회가 2018년 이후 잠정 중단했던 갈등기억유산에 대한 등재 심사도 재개될 수 있다.
이렇게 갈등기억유산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정리되고 이와 관련된 세계유산 등재 원칙이 합의된다면 그간 회원국 간에 불거진 갈등도 어느정도 봉합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해답 또한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의 유산을 통해 가늠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등재 조건 이행과 관련된 진전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일본이 ‘사도섬의 금산(金山)’의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니가타현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989년까지 금을 채취한 광산이었던 이곳에서도 일제시대 조선인의 강제노역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도 일본은 해당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에도시대(1603-1868년)의 금 생산으로 한정함으로써 유산의 전체 역사에서 강제동원이 있었던 20세기를 제외해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결국 갈등기억유산을 둘러싼 논란이 평화롭게 해결되기 위해서는 원칙과 절차의 정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다양하고 포용적인 유산 해석을 통해 평화로운 미래를 바라보고자 하는 당사국들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해 11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국제해석설명센터(WHIPIC)에서 발간한 『세계유산 해석 전략 수립을 위한 갈등 세계유산 사례 연구』는 각국이 갈등기억유산을 그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유산’으로 인식하는 대신, “다양한 주체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유산으로 재인식하고 이를 통해 이미 등재된 유산 혹은 앞으로 등재될 유산 역시 전체 역사를 담는 유산 해석으로 변화시키는 촉매재 역할”로 삼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해석
유산에 깃든 기억과 관련된 갈등은 사실 국가 간의 갈등이기에 앞서 우리 곁에도 늘 있어 왔던 갈등이다. 그것은 훨씬 더 가까이에서 더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경로로 우리에게 유산을 둘러싼 선택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한 예로 1990년대에 우리 사회는 광화문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싸고 큰 논쟁을 벌인 바 있다. 『한겨레21』에 따르면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 동아시아 전체에서 최대의 근대 건축물”이었던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보다는 이전 등의 대안을 주장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지만, 악의적인 의도로 정해진 건물 위치와 ‘민족 정신 회복’을 요청하는 여론에 따라 해당 건물은 1995년 광복절을 기점으로 완전히 철거됐다. 2007년에는 1926년 경성부청으로 지어진 서울시청 건물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촉발됐고, 구(舊) 서울역사 역시 같은 주제로 논의가 있었지만 이 두 건물은 유산이자 문화시설로 아직까지 보존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워킹그룹이 잠정 합의한 갈등기억유산의 정의는 ‘20세기 이후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갈등 중 국가와 (적어도 일부의) 국민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일이 일어난 장소’를 말한다. 이 정의를 생각하면 식민지배와 전쟁, 남과 북의 대치, 좌와 우의 대립 등 수많은 갈등으로 점철된 20세기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가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갈등기억유산을 마주할 가능성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례로 반환되고 있는 전국의 미군기지 터에 남겨진 일제시대와 6·25전쟁의 유산, 일제시대 수탈항이었던 곳에 남아있는 적산가옥과 산업 관련 시설물, 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사건 등 현대사의 참극이 벌어졌던 건물과 광장, 계곡, 동굴 등에는 누군가의 눈물이자 고통이며, 누군가의 역사교과서이자 반성문이며,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의 ‘눈엣가시’일 수도 있는 유산이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되살릴 고통스런 기억이 지긋지긋하다는 쪽에도, 그 기억조차 우리의 소중한 일부라는 쪽에도, 유산의 해석을 두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이유는 충분하다.
서로 상반되는 양쪽 모두의 의견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는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 해결책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내 목소리가 얼마나 존중받았는지, 비록 의견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는지에 따라 결과에 수긍하고 힘을 보탤 의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앞으로의 유산 등재 과정에서 갈등기억을 완화, 해소하거나 갈등기억을 가진 관련자를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산 해석은 자유롭게 모든 집단과 공동체 등이 참가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최재헌 교수의 말처럼, 우리가 유산으로부터 갈등이 아닌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유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찬가지로 각자의 목소리를 유산에게 들려줘야 한다. 유산이 민족적 긍지와 관광수익에 대한 기대뿐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게 해 줄 우리의 모든 기억을 빠짐없이 끌어안을 수 있을 때, 기억의 장소는 평화의 장소이자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