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씨름이 남북한 공동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금은 성급하지만, 어쩌면 ‘한반도 평화와 화해의 원년’으로도 기억될지 모를 2018년의 마지막을 유네스코가 멋지게 장식한 것이다. 그저 한 가지 무형문화유산의 등재 소식에 전 세계가 남북한에 특별한 축하를 보냈다는 사실은, 문화유산이 그만큼 우리 모두에게 단순한 유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그리고 유네스코에게, 유무형의문화유산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문화유산은 화해다
먼저 씨름의 남북한 공동등재 소식을 접한 한국인이라면 문화유산에 ‘화해’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데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화와 화해 시대를 향한 지난해 남북한의 과감한 발걸음을 씨름이라는 공동의 유산으로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씨름 말고도 남과 북이 공유하는 무형문화유산은 ‘차고 넘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그 중 아리랑과 김장(김치 담그기)은 이미 남과 북이 따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했다. 하지만 사실상 같은 문화를 남과 북이 별개로 등재했다는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남북의 대치를 재확인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의 유산이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 한편으로,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두 나라가 여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씁쓸함을 느껴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일부 학자와 단체들은 남북이 따로 등재한 무형문화유산을 사후에라도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9일 인천에서 열린 ‘2018 한국민속학자대회’에 참석한 강등학 강릉원주대 명예교수도 “남북 아리랑 연구자와 문화전문가들이 아리랑의 상호 접점을 모색해야 한다”며, “남북의 아리랑 사업은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단일화 작업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동등재가 유네스코 지정유산 등재 과정에서 아주 희귀한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른 매사냥(falconry)은 한국을 포함해 무려 19개국이 공동등재한 유산이다. 세계유산협약의 운영지침은 여러 국가의 영토에 걸쳐있는 유산을 ‘월경(越境)유산’ 혹은 ‘접경 지역유산’으로 명명하고, 이들 유산을 관련 국가가 공동으로 등재 신청하도록 권고하고 있기도 하다(『유네스코뉴스』 2018년 2월호 ‘유네스코 유산 오해와 진실’). 하지만 준비부터 완료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고 하는 ‘르코르뷔지에 건축물’의 공동등재 과정이 보여 주듯, 서로 다른 나라가 입장을 조율하고 유산의 보존과 관리 계획을 하나의 신청서에 담아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여전히 ‘휴전’ 중인 상태이자,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적인 전쟁 공포에 시달렸던 남과 북이 이번 공동등재를 성사시켰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남과 북, 그리고 유네스코의 특별한 노력이 없었다면 씨름 또한 아리랑이나 김장과 마찬가지로 따로 등재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남북한은 각각 2016년 3월과 2015년 3 월에 씨름 등재를 신청했지만 2016년 제11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정보보완(등재보류) 판정을 받았다. 이후 남북은 2017년 3월에 신청서를 수정하며 각각 공동등재를 요청하는 서한을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고, 유네스코 역시 충분치 않은 일정에도 양국과 위원회 사이를 오가며 공동등재 과정을 전폭 지원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 26일 오전(현지 시간), 아프리카 모리셔스 포트루이스에서 열린 제13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24개 위원국의 만장일치로 공동등재가 결정되었다. 정부간위원회 결정문 부록(13.COM 10.b.41)에는 위원회가 남북한의 이번 공동등재 신청을 ‘특별히’(on an exceptional basis)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는 내용이 명시돼있다.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도 “남북한의 공동등재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공동등재가 남북 평화 정착 과정에서 높은 상징성을 갖는 한편, 서로간에 이해의 다리를 놓고 평화를 만드는 문화유산의 힘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고 각별한 축하를 전했다.
문화유산은 치유다
지난 십여 년간 문화유산이 가장 수난을 겪은 지역인 중동, 특히 이라크 지역에서도 문화유산의 의미는 남다르다. 수없이 파괴되고 사라져버린 이 지역의 문화 유산들은,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봄’을 준비하는 치유의 바람이 되어 지역 주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라크 북부의 중심 도시인 모술(Mosul)은 풍부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아랍어로 ‘연결하는 자’(the connector)라는 뜻을 가진 이름대로 모술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과 북, 동과 서의 문화가 서로 연결되는 장소였다. 그 옛날, 강 동쪽 니네베(Nineveh)의 골목에서 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안정적이며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아줄레 사무총장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 아이들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로 키울 수는 없다”며,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이 자라나는 커뮤니티에 이라크의 풍부한 역사와 삶의 방식을 간직한 평화의 문화를 다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네스코는 이라크 정부와 유엔 사무총장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문화유산 복원과 활성화’ 및 ‘교육과 문화 담당 기구 재건’에서 국제 공조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통해 진행될 문화유산 복원 사업은 근래 유네스코가 시행한 복원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ISIL이 모술에서 완전히 쫓겨나기 전까지 약 3년간 테러리스트들은 이 지역의 모든 문화유산을 글자 그대로 완전히 파괴하고 약탈했다. 님루드(Nimrud)의 고고학 유적지, 모술 박물관, 나비 유니스 사원(Nabi Younnis Shrine), 알 하드바 미나레트(Al Hadba Minaret) 등, 천 년을 넘나드는 세월을 굳건히 견뎌온 유산들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도시의 주인이 바뀌면서 상대 문명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가 일어난 것은 지난 몇 천 년간 이 도시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양상이 전혀 달랐다. 박물관과 학교와 도서관은 모조리 불탔고, 학자와 예술가들은 공개 처형되었으며, 음악을 틀거나 듣는 것과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쫓겨난 주민들은 모술이 ISIL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도시 외곽 난민캠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술에서는 유·초등에서부터 고등 단계까지의 모든 교육 과정이 운영되지 않고 있으며, 몇 안 되는 교사와 학생들도 오랜 전쟁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작년 2월 쿠웨이트에서 열린 이라크 재건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Reconstruction of Iraq)가 모술 재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모술의 인간 중심적 복원’(reconstruction of Mosul in its human dimension)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쓰러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부족한 식량을 보급하는 것만으로는 이 도시의 삶과 문화가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다는 데 유엔과 이라크 정부, 그리고 유네스코는 뜻을 함께했다. 아줄레 사무총장이 임기 중 우선 순위로 「모술 정신의 부활」 (Revive the Spirit of Mosul) 이니셔티브를 출범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년 9월 10일 유네스코가 발표한 「모술 정신의 부활」기획안에 따르면, 인간 중심적 복원이란 문화와 교육을 지렛대로 활용해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안정적이며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아줄레 사무총장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 아이들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로 키울 수는 없다”며,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이 자라나는 커뮤니티에 이라크의 풍부한 역사와 삶의 방식을 간직한 평화의 문화를 다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네스코는 이라크 정부와 유엔 사무총장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문화유산 복원과 활성화’ 및 ‘교육과 문화 담당 기구 재건’에서 국제 공조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통해 진행될 문화유산 복원 사업은 근래 유네스코가 시행한 복원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삶의 터전이 망가진 지역에서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도서관을 챙기는 것은 결코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아줄레 사무총장의 말대로 유네스코의 이번 사업은 “쫓겨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그들의 역사와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ISIL이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전 세계에 방영한) 모술의 문화유산과 학교와 도서관이 폭파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배우고 생각하는 자유 시민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아줄레 사무총장의 말에는 문화유산의 힘에 대한 강한 믿음이 드러나 있다. 그 말대로 테러리스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그래서 더욱 철저히 파괴하고자 했던, 생각을 표현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기 위한 싹을 모술에서 다시 틔울 수 있다면, 시간과 역사 속에 깃든 모술의 영혼 또한 다시 숨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유산은 생활이다
갈라선 두 민족의 화해를 중재하고, 증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지역의 삶과 희망을 되살리는 치유의 역할도 좋지만, 문화유산의 가치를 논하는 담론이 언제나 이렇게 숭고하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 진중한 가치와는 별개로, 지구촌 곳곳에서 문화유산은 우리 일상 속으로 한 발 더 다가와 기쁘고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적지 않은 장소는 개인, 혹은 단체가 특정한 목적으로 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바자의 생-장-밥티스트 대성당(Cathédrale Saint-Jean-Baptiste de Bazas)에서는 2005년 가을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을 소유한 LVMH 회장의 딸인 델핀 아르노가 성대한 결혼식을 열었고,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인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나 윈스턴 처칠이 태어난 장소인 블레넘 궁(Blenheim Palace)은 아예 홈페이지의 주요 메뉴 중에 결혼식과 이벤트 임대 항목이 있을 정도다. 이밖에도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과 파리의 베르사유 궁, 빅토르 위고의 집과 로댕 박물관 등, 각국의 대표적 유네스코 문화유산 중에는 각종 이벤트 장소로 유료 대여가 가능한 곳이 많다. 이처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장소를 몇몇 부자나 기업이 돈을 내고 빌려 결혼식이나 파티 장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유산의 탁월하고 보편적인 인류 공동의 가치를 늘 강조해온 유네스코의 입장과 일견 배치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더 나아가 ‘문화유산을 돈 받고 팔아 넘기는 행태’로 비판받을 여지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2010-2017년까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부회장을 지낸 아르헨티나의 건축가이자 문화재 보존 전문가인 알프레도 콘티(Alfredo Conti) 박사는 이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콘티 박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문화유산의 경제적 활용은 대중들이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줄 기회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유네스코 『꾸리에』 2018년 10-12월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콘티 박사는 “문화유산은 그저 문화적 자원이 아니라 경제적 자원이기도 하다”라며, “보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단지 재원 마련이 이러한 수익 활동을 용인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콘티 박사는 “문화유산을 조금 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것이 문화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며, 그러한 사적인 이벤트를 통해 “대중들이 해당 문화유산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게 만들고, 훗날 더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그곳을 다시 찾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문화유산의 경제적 가치를 강조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키토 규범’(Norms of Quito, 1967) 등, 유네스코의 여러 문서에도 문화유산이 공공 활용적 기능(function of public utility)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물론, 콘티 박사의 이러한 주장이 문화유산을 수익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개방하고 대여하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앞서 예로 든 각국의 장소들도 대여가 허용되는 이벤트의 종류와 성격, 구체적인 공간의 규모와 위치, 방문객 수와 행사 시간, 심지어 대여 시 활용 가능한 식기와 음식과 음료의 종류까지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그 어떤 사업도 문화유산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문화유산 대여에 일반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큰 돈이 든다는 점에서, 그러한 정책이 진정 ‘대중’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콘티 박사의 주장이나 유네스코 유산의 상업적 활용을 두고 ‘유산이 곧 돈이라는 뜻’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콘티 박사의 주장은 그보다는 ‘문화란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문화 유산 또한 우리 삶 속에 가까이 있을 때 더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문화는, 그리고 문화유산은, 결국 박제된 시간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아 숨쉬는 것이며, 생활 속에서 인간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쌓아나갈 때 진정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편집장
참고자료
unesco.org “Traditional Korean Wrestling Listed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Following Unprecedented Merged Application From Both Koreas”, “Revive the Spirit of Mosul”, “Heritage for Hire: a Good Idea?”
hani.co.kr “아리랑 남·북 따로 가면 발병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공동 등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