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넥스트 노멀’ 생활
푹푹 찌는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마스크를 챙겨 쓰는 것도, 아크릴 판을 사이에 두고 각자 함께지만 함께가 아닌 것 같은 식사를 하는 것도, 이제는 모두 일상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우리는 어느덧 ‘코로나 시대’에 적응해 살고 있다. ‘뉴 노멀’이란 용어가 벌써부터 ‘노멀’하게 들리는 지금,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전과 다른 세상에 무사히 적응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 뿐일까? 유네스코는 새로운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한 비법을, 그 세상의 기준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
대중매체 속 광고나 캠페인을 통해 전달되는 ‘뉴 노멀’과 관련한 메시지는 대개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바뀌고 있고 그 변화는 되돌릴 수 없으므로 일단은 여기에 적응하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연히 대중은 이러한 메시지를 접하면서 과거와는 달라진 우리 일상과 사회 생활 방식이 ‘정상’(normal)인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 주변, 특히 미디어에 주로 노출되는 ‘선진국 중산층 이상 일반인들의 삶’이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인류 전체가 같은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는 주장의 전제로 충분한 것일까? 제3세계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면서 최근 점점 많은 사람들은 ‘괜찮지 않을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치메 아소녜(Chime Asonye) 전 나이지리아 아비아주지사 선임특보도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이 중 하나다. 그는 6월 5일자 세계경제포럼 기고문에서 “뉴 노멀이란 말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던지며 이같은 목소리를 전하고, “이 말은 마치 지금 상태가 정상적이라는 듯 현실을 탈색시킨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금의 병적인 현실(morbid reality)이 새로운 표준이라는 사실에 적응하기 위해 대중은 절망과 상실감조차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고 꼬집으며 ‘이대로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뉴 노멀 시대를 일반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덧붙여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은 그저 현 상황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러한 변화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소화해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게 해 주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정신과 분야 전문가들도 아소녜 전 특보의 주장처럼 새로운 세상에 무작정 적응하는 것이 모두에게 올바른 해답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각자가 느끼는 상실감과 슬픔을 직시하고, 이를 나름의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적응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트라우마 치료사 테리 대니얼(Terri Daniel)은 미 공영라디오(NPR)와의 인터뷰에서 “불확실성의 시대에 각자 잃어버린 일상과 사회적 연결망, 가족 관계 등을 인지하고 이를 슬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며, “분노와 실망, 비난, 무력감 등의 근원이 슬픔이라는 점을 인지한 다음에야 그 다음으로 넘어갈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비록 새롭게 바뀐 일상과 생활 양태에 열심히 적응해 나가고는 있지만, 지금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낯설고 어색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애써 잊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스크를 쓰며 답답함을 느끼는 것, 햇빛이 좋은 날 보고 싶은 이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을때 서로 모여 감정을 나누고자 하는 것 등, 유발 하라리가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올려놓은 유일무이한 특성’이라고 했던 사회적 본성을 무시한 채 그저 ‘괜찮다’고만 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슬퍼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억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새 시대의 진면목을 차분한 마음으로 반추해 볼 여유를 갖게 될 것이며, “뉴 노멀은 인류의 다수가 실제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설명하는 말일 뿐”이라는 아소녜 전 특보의 주장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새 시대에도 유효한 ‘해묵은 해법’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뉴 노멀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는 유네스코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유네스코는 ‘노멀’이란 단어의 보편적이고 평등한 속성을 구현하지 못한 채 뉴 노멀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며, 아무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우리 모두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용, 공정, 평화와 같은, 우리가 여태 완전히 이루지 못했던 가치들이 다음 시대의 표준(next normal)이 되어야 한다는 ‘넥스트 노멀’ 캠페인을 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페티 만주리(Fethi Mansouri) 호주 디킨대 유네스코 석좌교수는 지난 5월 유네스코에 기고한 글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들이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포하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적 연대를 통해서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주리 교수는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코로나19 등장 이후 가장 일상적인 단어가 되다시피 한 말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감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코로나19에 대한 전 세계적 대응책은 ‘물리적 거리두기’(physical distancing)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 말은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로 두서없이 쓰이고 있다”며, “물리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단절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적 단절 없이 물리적 거리두기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머무를 수 있는 장소와 인터넷 연결, 집에서 일상의 요구를 해결하게 해 줄 기본 인프라가 모두에게 갖춰져야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분석하고,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경제적 소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시대에 이같은 기본적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채 곤궁한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 노멀 시대 일상의 기본을 이루는 거리두기가 사실은 구시대의 뿌리깊은 불평등과 경제적 소외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간 대중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 온 코로나 이후 시대의 모습에 ‘새로운’(new)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뉴 노멀을 이야기하는 지금 세상이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전혀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는 여전히 인종주의의 차별로 인한 갈등과 폭력에 관한 ‘해묵은’ 소식들이 넘쳐나며, 이를 해결할 열쇠가 여전히 유네스코를 비롯한 모든 국제기구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대화와 타협과 관용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 뿐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새로운 시대와 해묵은 갈등, 그리고 더 오래된 해법. 이 셋의 어색한 조합 속에서 적절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만주리 교수의 대답은 결국 “전 인류적 연대와 문화 간 대화만이 답”이라는 것이다. 만주리 교수는 “사람 간 거리두기를 강요하고 기존 사회 시스템이 멈춰 선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인류의 대응책 중 하나가 다름아닌 지역적·국가적 차원의 ‘연대’라는 점은 이 팬데믹 시대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라고 말하며, 이러한 연대와 포용의 정신이야말로 “이상적이며 윤리적인 해법인 동시에 인류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안전과 웰빙을 위한 지극히 실용적이며 맞춤형의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원상회복이 아닌 변화의 시작
연대와 포용의 가치가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면, 새 시대를 열고 주도해 나갈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교육 분야에서 고민해야 할 사항도 더욱 명확해진다. 바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공교육과 사교육 할 것 없이 교육계의 우선적인 고민은 학생과 교사가 어떻게 안전하게 교육을 받도록 할 것인가에 있었다. 정부와 시민들도 학교 방역 대책은 잘 시행되고 있는지, 온라인 교육 격차 해소 방안은 없는지, 등록금 환불 등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킬 방안은 없는지 등에 대한 것들을 주로 고민했다. 물론 이는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교육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모두를 위한 교육을 이어 나가기 위해 먼저 살펴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교육이 정의로운 새 시대의 초석”이 될 수 있도록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테파니아 지아니니(Stefania Giannini) 유네스코 교육 사무총장보는 “교육계는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원격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디지털 격차와 학생들의 건강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지만, 이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위기가 지나간 뒤 교육 체계 전반을 새 시대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육 분야 역시 바뀐 시대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 시대의 기준을 새로 만들어 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4월 지구의 날을 맞아 각국 정부를 향해 내놓은 ‘더 나은 재건을’(Build Back Better)이라는 메시지와도 맥을 같이 한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팬데믹 이후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을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고, 지아니니 사무총장보는 그것이 “과거에 비해 더 지속가능하고 더 유연하며 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아니니 사무총장보는 이를 위해 “다음 세대를 길러낼 교육계 리더들은 이 혼란의 시기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삶과 나아가 이 행성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지속가능발전교육(ESD)과 같은 유네스코의 교육 의제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환경 및 경제 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비판적 시각과 공감 능력을 갖추고 지역사회 및 전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데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교육계가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진짜 노멀’이 실현되는 그날
코로나19가 등장한 지 채 일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많은 사람들은 올해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원년’이라 부르며 인류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흔적을 남긴 이 사건을 기억하려 하고 있다. 더불어 바이러스 창궐 이후 바뀌어버린 우리 일상의 기준을 ‘뉴 노멀’이라 칭하며 그 속에서 안착하기 위한 방법을 여기저기서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대로 유네스코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목소리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위기 이후의 시대에 대한 논의의 초점이 ‘원상회복’이어서도, ‘이대로의 적응’이어서도 안 된다고 진단한다. 2020년 이전과 이후 할 것 없이 현재 인류 사회와 지구 전체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과제들이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한쪽이 비대면 수업으로 성적 잘 내는 법을 고민할 때 세상의 반대편에서는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게 해 줄 물 한 통이 여전히 절실한 지금, 유엔이 말하는 ‘더 나은 재건’이나 유네스코가 펼치는 ‘넥스트 노멀’ 캠페인은 인류가 맞이할 새로운 일상의 기준을 바로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지점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언젠가는 이 바이러스를 물리칠 것이고, 인류 역시 미래의 또다른 위협에 어떤 식으로든 대처해 나가겠지만, 우리 모두가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던 일상에 합리적인 의문을 갖고 건설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네스코가 기다리고 있는 진짜 노멀한 세상을 여는 첫 번째 단추는, 인류 개개인과 지구를 병들게 했던 모든 요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 아닐까.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
[참고자료]
· npr.org “Coronavirus Has Upended Our World. It’s OK To Grieve”
· unesco.org “A Year After Coronavirus: An Inclusive ‘New Normal’”, “Build Back Better: Education Must Change After COVID-19 to Meet the Climate Crisis”, “Education is the Bedrock of a Just Society in the Post-COVID World”, “Socio-Cultural Implications of COVID-19”
· weforum.org “There’s Nothing New about the ‘New Normal’. Here’s W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