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들의 평화 활동이야말로 마크 트웨인의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Work like you don’t need the money)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인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 다른 모든 일처럼, 국제기구의 활동 역시 한정된 예산 안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예산의 바탕이 되는,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을 둘러싼 국가별 다양한 관점에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 과정은 지난하고 더디나,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기부인 듯 기부 아닌 기부 같은” 분담금
유네스코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예산은 크게 정규예산과 비정규예산으로 나뉜다. 유네스코 주요 사업비와 인건비, 시설비 등이 포함되는 정규예산은 회원국들이 내는 분담금으로 충당되고, 분담금과 별도로 국제기구나 단체 혹은 회원국들이 특정 유네스코 사업을 위해 비정기적으로 기여하는 현금이나 현물은 비정규예산에 속한다. 정규예산과 정규예산을 구성하는 회원국별 분담금 규모는 매 2년마다 유네스코 총회를 통해 결정된다. 이 때 각국의 분담률은 국민총소득 등을 고려해 유엔 총회가 결정하는 사항을 근거로 산출된다. 지난 2015년 말 제3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2016~2017년 유네스코 정규예산 규모는 6억 6700만 달러. 총회에서 함께 채택된 회원국별 분담률은 같은 해 열린 제70차 유엔 총회의 결정을 바탕으로 미국(22%), 일본(9.679%), 중국(7.920%), 독일(6.389%) 등의 순으로 정해졌다. 한국에는 195개 회원국 중 13번째인 2.039%의 분담률이 책정됐다. 분담률 순위에서 볼 수 있듯 유네스코 정규예산의 대부분은 상위 20여 개 국가의 분담금으로 대부분 충당된다. 최대 분담률의 미국이 매년 부담하는 분담금(22%, 약 7300만 달러)은 최하위 그룹 국가에 부과된 분담금(0.001%, 약 3300달러)의 2만 2000배가 넘는다. 이는 분담금이 비록 회원국들에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금액이지만 단순한 ‘회비’의 개념이 아닌 ‘기여금’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분담금이 오롯이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인 자율 기부금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2011년 이후, 후술할 정치적 이유로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는 미국은 2013년부터 총회 투표권을 상실한 상태다.
국제기구 예산, ‘평화의 방벽’ 쌓는 데 충분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편성되는 예산 규모는 유네스코가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업을 펼치기에 충분한 금액일까? 올해 기준으로 각국에 배정된 분담금이 시한 내에 납부된다고 가정했을 때 유네스코는 2년간 6억 6700만 달러, 1년 단위로 약 3억 3350만 달러(약 3900억 원)를 정규 예산으로 쓸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정규예산보다 약간 더 많은 수준에서 편성되고 있는 비정규예산 금액을 합쳐도 연간 약 7억 달러 정도의 규모다. 이 예산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육지원에서부터 대양의 해저 연구와 전 세계 문화유산 관련 사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유네스코가 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것인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굳이 애플 사의 지난해 4/4분기 매출액(469억 달러)이나 순이익(178억 달러)과 비교하지 않아도 이 예산이 ‘차고 넘치는 수준’이 아님은 분명하다. 유네스코를 포함한 유엔 전체의 예산으로 시선을 넓히면 예산 규모의 적정성에 대해 또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유엔의 활동 및 예산 씀씀이를 감시하는 독립기구 글로벌폴리시포럼(Global Policy Forum)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전체 유엔기구와 국제기금의 연간 지출액 합은 약 300억 달러. 이는 1년간 인류 1명당 약 4달러 정도의 도움을 줄 수있는 금액이다. 또한 대다수 개발도상국 이상 국가의 1년 예산보다 적은 금액이며, 전 세계 군사비 지출액의 약 1.7%에 해당한다(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 추산 기준).
재정난 속에 빛난 유네스코의 원칙
예산 규모의 적정성을 떠나, 이마저도 분담금 체납으로 인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유네스코의 경우 미국이 지난 2011년 11월 유네스코 총회가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승인한 직후 이스라엘과 함께 분담금 납입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예산에 큰 구멍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인정하는 어떤 국제기구에도 지원금을 납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두 건의 외교관계법안이 1990년대 초부터 발효 중이다. 이 법안에 근거한 미국의 조치로 유네스코는 2015년까지 정규예산 규모를 동결하는 한편 정규예산 규모를 훨씬 밑도는 규모의 별도 지출계획을 세워 대응하고 있지만 여러 사업이 축소되고 인력 공백이 발생하는 등 활동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같은 유네스코의 재정난은 회원국 분담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국제기구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네스코만의 개방성과 평화를 위한 원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정 국가의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유네스코에서는 어떤 국가든 총회에서 2/3 이상의 찬성표를 받으면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다. 이 덕분에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남태평양의 섬나라 니우에(Niue) 등 우리에게 이름도 생소한 국가들이 유엔 가입에 앞서 유네스코 회원국이 될 수 있었고, 유네스코는 유엔을 넘어서는 ‘세계 최다 회원국 보유 국제기구’로 자리할 수 있었다. 각국의 분담금 규모가 판이하게 다르며, 최빈국 국가들은 자국이 납부하는 분담금보다 훨씬 많은 지원을 받고 있지만 유네스코 안에서 회원국의 권리와 위상도 동등하다. 분담금을 장기 체납하지 않는 한 총회에서의 투표권도 1표씩이며, 무소불위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같은 ‘특권층’도 없다. 미국이 분담금 납입 중단을 경고하며 팔레스타인의 회원국 인정을 반대했음에도 회원국 다수가 투표를 통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도 결국 유네스코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해 교류와 협력,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민주적이고 비정치적인 기구로서 원칙을 잃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예다.
분담금 규모와 권한 행사의 상관관계
한편, 미국의 분담금 납입 중단 이후 회원국 중 최대 분담금 납입국이 된 일본 역시 최근 분담금을 붙잡고 유네스코 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기준 연간 약 3200만 달러(약 376억 원)의 분담금이 부과된 일본은 2015년 10월 중국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데 이어 지난해 6월 한국과 중국 등의 시민단체들이 위안부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하자 세계기록유산의 심사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작년분 분담금 지급을 미뤘다. 이후 지난해 10월 “기록유산 선정 시 회원국 대표가 참가하는 ‘정부간위원회’를 설치해 등록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의견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했고,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가 올 4월 중 개선책을 내놓겠다는 발표를 한 뒤에야 연말 분담금 지급을 약속한 바 있다.
특정 기업에 투자를 한 주주가 해당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자신이 낸 투자금만큼의 ‘목소리’를 반영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국제기구에 내는 각국의 분담금이 이 같은 투자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각국은 국제기구의 분담금 납입이 적절한 시기에 이뤄질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다양한 경로로 요청하고 있다. 멕시코와 나이지리아는 ‘분담금 납부 의무’를 더욱 강조해야 함을 주문했고, 세인트키츠네비스는 체납에 대한 ‘패널티’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개별 국가가 국제기구에 기여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도 분담금을 매개로 한 압력 행사의 근거를 약화시키고 있다. 분담금은 가장 눈에 띄고 쉽게 계량화할 수 있는 기여의 형태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국제기구가 필요로 하는 기여의 전부는 아니다. 유네스코만 해도 정규예산 외 비정규예산의 상당 부분은 각국이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현물 또는 서비스로 이뤄져 있다. 유엔 활동으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표3>에서 보듯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 비용의 80% 이상은 미국을 비롯한 10여 개 국가들이 맡고 있지만, 현장에서 직접 임무를 수행하는 병력의 절대 다수는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인도, 파키스탄, 르완다 등에서 충원되고 있다.
‘모두의 이익’ 위한 분담금 납부
이러한 이유와 국제사회의 우려 등으로 인해 분담금 체납 문제 해소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현재 유네스코 전체 분담금 체납액의 91%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2013년 11월 미국이 총회 투표권을 상실한 직후 수전 라이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팔레스타인을 받아들이는 국제기구에 대한 지원금 중단을 담은) 현행법은 (팔레스타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에 핸디캡을 주고 있다”며 의회의 법 개정을 촉구한 바 있고, 젠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 역시 “유네스코는 여성 교육과 과학 연구를 지원하며 사회적 관용을 증진하고 세계 자연•문화 유산을 보호하는 등 많은 분야에서 미국에 직접적 이익을 주고 있다”며 분담금 납입 재개가 단순히 지구촌 평화를 위한 ‘선의’의 성격이 아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임을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데렉 데이비슨(Derek Davison) 시카고 대 중동학 박사는 “미국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슬람국가(IS)의 자금줄이 석유 시설을 잃은 이후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것은 ‘옮길 수 있는 유물은 암시장에 팔고 그렇지 못한 것은 파괴하는’ IS의 문화유적 밀수 전략 덕분”이라며 “그 전략을 앞장서 막아 온 것이 유네스코임을 감안하면, 유네스코 분담금 납입 중단의 원인이 된 ‘20년 전에 만들어진 법안’이야말로 미국의 안보에 훨씬 더 큰 위협”이라고 말했다.
이런 목소리들에도 불구하고 미 의회에 분담금 납입 재개를 요청해 온 오바마 행정부와는 정책적 관점이 전혀 다른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가 시작되는 등, 끊임없이 변하는 국제정치환경 속에서 유네스코의 재정문제가 금방 해결될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유네스코 역시 단순히 한 국가의 분담금 재납입만 기다리는 대신 예산 절감과 집행 효율성을 높이는 등 체질을 개선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회원국들이, 나아가 전 인류가 유네스코의 재정 정상화를 기다리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 속에 평화의 방벽을 쌓는” 그 일이 다른 어떤 경제적•정치역학적 관점보다 가치 있는 일임을 모두가 확신하기 때문이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