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호] 특집
지난해 12월 7일 오전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12차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이하 정부간위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는 회의장에 앉은 채,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의 나폴리 풍경을 그려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꼭 한 해 전 이맘때쯤 이곳 제주도가 그랬듯, 환호와 자부심과 흥겨움으로 하루를 열고 닫았을 나폴리의 모습이 머릿속에 기시감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날 나폴리의 피자 만들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최종 등재됐다.
나폴리 현장을 취재한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이날 나폴리 시내 주요 피체리아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통에 조각 피자를 가득 담아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하루종일 축하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클라크 게이블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라는 한 종업원의 코멘트도 담겼다(1950년대 헐리우드 슈퍼스타인 클라크 게이블은 소피아 로렌과 함께 영화 <나폴리의 기적>을 이곳에서 찍었다). ‘내 문화’가 전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이처럼 어디에서나 특별한 기쁨이다. 그 가슴 벅찬 순간이 탄생하는 자리인 정부간위원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열렸다.
”해녀의 섬”에서 개최된 한국 첫 정부간위원회
2003년에 채택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에 따른 정부간위원회는 매년 한차례 열린다. 이 자리에서 협약 가입국은 협약 이행 상황과 성과 등에 관한 보고서를 채택하고, 무형문화유산긴급보호목록(이하 긴급보호목록)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이하 대표목록) 등의 목록에 새로 등재될 유산을 결정한다. 지난 12월 4일 개회식을 시작으로 12월 9일까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정부간위원회에서는 긴급보호목록 6건, 대표목록 35건, 문화유산보호 모범사례 4건, 국제원조요청 3건, 긴급보호목록 제외 및 대표목록으로의 이동신청 1건 등 모두 49건에 대한 심사가 진행됐다. 2016년에 열린 제11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제주도의 해녀 문화를 대표목록에 등재한 한국은 이번에 등재 신청 건이 없다. 이는 한국이 공동등재를 포함해 모두 19건에 이르는 무형유산을 대표목록에 등재한 ‘다등재국’이기 때문이다. 다등재국은 2년에 1건만 등재 신청을 할 수 있다.
이번 정부간위원회 개최의 주요 실무를 맡은 문화재청 세계유산팀 황권순 팀장은 이를 다소 아쉬워했다. 현장에서 만난 황 팀장은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지난 2003년 탄생한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의 정부간위원회를 처음으로 한국서 개최하게돼 의미가 크다”면서도 “우리 유산의 등재 소식이 없다는 점은 실무자로서 아쉽긴 하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기회에 무형유산보호에 관한 우리의 앞선 인식과 제도를 보여준다면, 내년 등재를 추진 중인 씨름이 나 기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역할 수행에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정부간위원회에서 미디어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일정은 역시 대표목록 등재 심사지만,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내용은 많다. 황 팀장은 이번 정부간위원회에서 채택돼 차기 유네스코 총회에서 의결해 줄 것을 요청한 ‘종합성과평가체계’(Overall Result Framework)를 그 중 하나로 꼽았다. 종합성과평가체계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의 활동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 항목으로 만들고, 단계별 성과를 평가토록 하는 시스템이다. 황 팀장은 “이 체계의 내용에는 우리나라에서 무형문화재법으로 시행 중인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며 “종합성과평가체계가 정식 활용된다면, 이미 유사한 내용을 법으로 시행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그간 쌓은 노하우나 시행착오 경험을 여러 당사국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서른 세 번의 박수 갈채
12월 6~7일에 걸쳐 진행된 대표목록 등재 심사에서 최종 등재 결정을 받은 유산은 모두 33건이다. 총 35건의 신청 유산 중 신청국이 등재 철회를 선언한 1건을 제외하면, 이번 정부간위원회에서 등재가 보류된 유산은 단 한 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등재 신청 및 심사가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현장에서 만난 정부간위원회 심사기구(Evaluation Body)의 아흐메드 스코운티 의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심사기구는 등재신청 유산을 독립적으로 평가해 등재 권고 여부를 정부간위원회에 보고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신청 유산이 목록별로 5~9가지에 달하는 등재 기준을 충족하는지를 살피는 데 집중한다. 이 중 한두 개 항목이 부족한 경우 내려지는 ‘등재 보류’(refer)는 해당 부분을 보완해 차후 재신청하라는 의미다. 인권이나 성평등 등 인류보편가치에 맞지 않는 유산에는 등재 불가 의견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등재 권고를 받지 못하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평가기구에서 지적된 사항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하고, 다시 평가를 받아 차후에 등재되는 유산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스코운티 의장은 심사기구의 심사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며, “이 과정은 등재 신청국이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에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등재를 돕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평가는 날카롭게, 심사는 관대하게
스코운티 의장의 말에 따르면 심사기구는 ‘까탈스런 감독관’이 아니라 ‘너그러운 멘토’다. 12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시행된 ‘듀얼 옵션’(dual option)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표목록과 긴급보호목록 등재 신청 유산의 5번째 심사 항목인 R5와 U5는 ‘유산 목록 작성’과 관련된 항목으로, 심사 과정에서 미비점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부분이다. 이에 다음 정부간위원회부터는 해당 항목에 개정된 신청 양식이 활용될 예정이다. 심사기구는 이번 회기에 한해 R5와 U5에 대한 심사기구의 결정에 ‘조건부 등재 권고’에 해당하는 옵션을 두기로 했다. 정부간위원회에서 신청국의 소명과 자료 제공이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등재 권고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스코운티 의장은 “사소한 기술적 미비점 때문에 등재 보류 판정을 내리는 대신, 소명이 충분하다면 현장에서 유산 등재 기회를 한 번 더 주게 된 셈”이라 말했다.
이러한 배려는 체계적인 유산 보호와 등재 관련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저개발국이나 등재 신청이 처음인 국가에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실제로 12월 7일 오전에 정부간위원회 심사에 오른 아일랜드의 ‘율리안 파이프’는 현장에서 미비점에 대한 소명 기회를 갖고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 등재에 성공해, 아일랜드의 첫 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문화가 됐다.
벌써 우리 안에 있는 타인의 문화
이번 정부간위원회에서도 대표목록에 등재된 유산 중에는 우리 문화가 아님에도 우리가 반가움을 느낄 만한 대상이 여럿 보였다. 이미 우리 일상 속 평범한 음식 중 하나가 된 나폴리 피자가 그랬고, 황금빛 보리밭 사이로 그 특유의 선율이 귀에 들릴 것만 같은 아일랜드의 율리안 파이프도 그랬다. 낯설지 않은 문화가 대표목록에 등재될 때, 저도 모르게 손뼉을 더 크게 치게되는 것도 같았다.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 같은 느낌으로, 몇몇 문화는 그렇게 더 많은 환호의 대상이 됐다.
문화의 힘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이동하고 스며들고 섞여, 다양한 맛과 새로운 멋을 내며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환호에 내 마음이 함께 공명하고, 이미 낯선 타인의 문화에도 깊은 동질감을 표할 수 있는 것. 우리는 문화다양성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문화가 다양하게 공존할 때 정말로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체험할 기회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전 세계의 집단적인 노력과 지혜를 모아 미처 몰랐던 문화에 눈길을 주고, 잘 알았던 문화를 더 잘 알고 보존하도록 만드는 정부간위원회의 이 모든 과정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