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늘 ‘페어플레이’를 강조해 왔지만 정작 스포츠 업계는 우리 생각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무대는 아니었다. 세계 최강의 여자 축구팀이 월드컵 2연패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남녀 동등 보수’를 외친 것처럼, 스포츠계는 지금 성별이나 장애, 인종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는 ‘차별 없는 스포츠’를 어릴 때부터 즐기도록 하는 것이 스포츠 분야, 나아가 사회 전체의 평등을 이루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페미니즘 월드컵’에서 울려퍼진 구호
지난달 7일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2019 피파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서 미국이 네덜란드를 2대0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하는 순간, 경기장은 관중과 선수들의 뜨거운 환호로 뒤덮였다. 하지만 대회 2연패에 성공하며 세계 최강임을 재입증한 미국 대표팀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그간 ‘남자 월드컵’ 결승에서 익히 보았던 장면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경기장에는 승자에 대한 환호만큼이나 마치 노동계 시위 현장의 외침 같은 “동등한 보수를!”(Equal pay!)이라는 구호가 넘쳤고, 대회 최다득점자이자 최우수선수로 뽑힌 메건 래피노(Megan Rapinoe)는 기자회견에서 “이제 다음 이야기를 해 보자”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국내 한 유명 축구 해설가가 “이번 대회는 역대 첫 페미니즘 월드컵”이라 했을 정도로, 이번 월드컵은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역대 가장 성공적인 대회이자 많은 화제를 낳은 대회로 평가받았다.
대회기간 내내 경기장 안팎에서 성평등 관련 구호가 넘친 데는 세계 최강팀이자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대표팀의 공이 컸다. 대표팀 핵심 선수들과 미국 내 28개 여자축구단이 지난 3월 ‘조직적인 성차별로 인한 부당 임금 차별’을 이유로 미국 축구협회를 상대로 낸 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축구협회와의 소송을 택한 이들의 행동이 촉발시킨 논쟁은 아직도 미 스포츠계의 큰 화두다. “그러고도 우승할 수 있는지 두고보자”는 일부의 시선을 뒤로하고 대회에 나선만큼 미국팀 선수들이 느꼈을 부담감도 결코 적지 않았다. 우승 직후 메건 래피노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부담이 컸다”며 “우승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이 일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었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골키퍼 애쉴린 해리스(Ashlyn Harris)도 “어쩌면 우리팀은 월드컵 우승보다도 소송으로 더 많이 기억될 것”이라면서도 “옳은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여성으로서 우리가 남긴 유산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적게 먹기 때문일까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원칙에 비춰볼 때 미 여자 축구 대표팀이 받는 보수는 남자 축구 대표팀이 받는 보수와 비교할 때 상식적인 수준이라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2015년부터 올해까지 월드컵 2연패를 이끈 질 엘리스(Jill Ellis) 감독이 지난해 축구협회로부터 받은 연봉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중도 해고된 위르겐 클린스만 남자대표팀 감독이 받은 연봉의 10분의 1 수준이며 미국 남자 청소년팀 감독의 연봉보다도 적다. 2016년에도 차별적 수당 제공을 이유로 축구협회를 제소한 바 있는 여자 대표팀 선수 칼리 로이드(Carli Lloyd)는 “(2015년 한 해 동안) 260일간 대표팀 일정을 소화했던 내가 받은 수당이 하루 60달러였던 반면 남자팀 선수는 하루 75달러를 받았다”며 “여자 선수가 더 작고 덜 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꼬집기도 했다.
남녀 간의 이같은 격차는 축구뿐만 아니라 스포츠 업계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난해 8월 미국의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이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미 여자프로농구(WNBA)의 베테랑 선수가 받는 최고 연봉은 11만3500달러로, 남자프로농구(NBA) 선수의 최소 연봉인 83만8464달러의 13%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두 리그가 벌어들이는 절대적인 수익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는 만큼, 여자 선수들 역시 연봉의 절대 액수를 남자 선수 연봉과 동일하게 맞춰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NBA 각 구단이 매년 적잖은 수익을 남기는 반면 WNBA 구단 중 흑자를 기록하는 구단이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같은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NBA 선수들 연봉 총액이 리그 총 수입의 50%에 달하는 반면, WNBA 선수들의 연봉 총액은 리그 총 수입의 22%에 그친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각 리그가 선수 개개인에게 매기는 가치를, 남성에 비해 여성에 훨씬 적게 매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월급’ 아닌 ‘구조’의 문제
미 여자 축구 대표선수들의 소송은 시장의 크기나 수익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남녀 간 보수 격차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적 면에서나 인기 면에서 남자 축구팀보다 월등한 성과를 내왔다는 자신감도 이들의 커다란 자산이다. 미국 축구협회가 내놓은 회계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미 여자 축구 대표팀은 지난 수년간 남자 축구 대표팀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협회에 안겨주었고, 2015년 여자 대표팀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기록한 TV시청률은 아직까지도 남녀 통틀어 미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축구 경기로 남아있다. ‘남자 선수가 인기가 많고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다. 따라서 선수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자 선수들이 그저 동등한 보수 지급을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스포츠 업계에서 당연한 듯 행해지는 근본적이며 구조적인 차별을 없애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로골퍼 출신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애냐 알바레즈(Anya Alvarez)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지금까지는 동등 보수가 여성 스포츠 업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잘못”이라며, “차등적 마케팅과 차등적 프로모션 같은 스포츠 업계의 조직적 성차별(systematic sexism)의 관행이야말로 차등 보수를 낳은 근본 원인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재능을 적절한 수준으로 상업화할 수 있게 해 줄 토대와 지원이 남성 스포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알바레즈는 “단지 동등한 보수를 받는 것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여성 스포츠가 남성 스포츠와 동등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전제들을 개선해야 한다”며 “이 부분의 진전 없이 얻어내는 급여 인상은 결국 반대론자들에게 ‘수익도 못 내는데 왜 같은 보수를 지급하나’와 같은 비판의 여지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임을 바꾸기 위한 교육
알바레즈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여성 스포츠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투자를 이끌어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여성 스포츠의 저변이 지금보다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여성들의 더 많은 재능이 스포츠로 모이고, 대중들이 여기에 호응할 때 변화를 이끌어낼 사회적 동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여자 월드컵 개막 직전인 지난 6월 4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여성과 축구: 게임을 바꿔라(#ChangeTheGame)’라는 토론회를 열고 프랑스 국제전략문제연구소와 함께 『축구가 여성과 운을 맞출 때』(When Football Rhymes with Women)라는 보고서를 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우리는 지금 성평등으로 가는 여정에 있지만 여전히 싸워야 할 부분이 많다”며 “그러한 싸움은 (스포츠 업계에서)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줄레 사무총장은 유네스코가 곧 ‘카잔 실행계획’(Kazan Action Plan)을 바탕으로 스위스 정부와 함께 여성과 스포츠 관련 전 지구적 조사 기구(Global Observatory)를 만들 예정이라고도 덧붙였다.
카잔 실행계획은 2017년 7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제6회 국제체육장관회의(World Conference of Sport Ministers, MINEPS VI)에서 마련된 것으로, 유엔 2030 아젠다와 지속가능발전목표의 가치를 각국의 스포츠 관련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밑그림을 담고 있다. 유네스코는 향후 몇 년간 체육 교육과 스포츠를 위한 정부간위원회(Intergovernmental Committee for Physical Education and Sport, CIGEPS)등과 협력해 카잔 실행계획을 가다듬고, 성평등을 통해 모두가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체육 교육이 건강, 도시환경, 사회 등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나갈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유네스코는 특히 모든 사람이 어릴 때부터 성별과 인종, 장애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스포츠나 체육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폭력에 저항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바탕이라고 믿고 있다. 이같은 믿음은 1978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체육 교육, 신체 활동 및 스포츠에 관한 국제 헌장’(International Charter of Physical Education, Physical Activity and Sport)에 반영돼, 차별 없는 스포츠와 체육 활동이 교육의 중요한 요소이자 기본권이라는 공감대가 전 세계 회원국들 사이에서 형성됐다. 유네스코는 이러한 공감대가 각국의 체육 및 교육 관련 정책에 충실히 반영돼 모든 사람들이 유소년 시기때부터 수준 높은 체육 교육(quality physical education, QPE)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관련 가이드라인과 정책 안내서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 2015년에 발간한 『정책 입안자를 위한 QPE 가이드라인』에서도 유네스코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의 포용적 접근을 강조하며 ▲성평등 ▲ 장애 ▲ 소수자의 세 가지 측면에서 원칙에 부합하는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짜 정정 당당한 스포츠를 위해
예나 지금이나 ‘페어플레이’는 스포츠에서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가치 중 하나다. 상대를 존중하며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스포츠의 가치가 포용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의 중요한 밑바탕이 될 수 있기에 전 세계는 스포츠를 중요한 교육 도구이자 당연한 권리로 여긴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에게 젠더, 인권, 장애에 대한 감수성이 요구되면서, 스포츠에서의 페어플레이 역시 ‘경기장 위에 선 비장애인 남성들’ 간의 덕목에 그칠 수는 없게 되었다. 성별, 장애 여부, 인종, 환경에 상관 없이 누구든 원하는 스포츠를 즐기도록 하는 것.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평평하게 다져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페어플레이다. 불과 15년 전, 제프 블래터 당시 국제축구연맹 회장은 “더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자 선수들에게 딱 달라붙는 하의를 입히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약 한 달 전, 미국 뉴욕에 마련된 성대한 환영 행사장에 올라선 메건 래피노는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우리 팀은 정말 터프하고 나쁜 녀석들이에요. 핑크 머리와 보라색 머리도 있고, 문신과 레게머리도 있고, 흑인과 백인과 그 중간쯤의 모든 인종도 있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도 있죠. 내가 이런 팀의 공동 주장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유네스코를 비롯한 여러 기관과 단체, 시민들이 그간 펼쳐온 노력이, 바로 이 두 발언의 간격만큼이나 시원한 슛을 전 세계에 쏘아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김보람 『유네스코뉴스』편집장